모리츠의 탄원서 그리고 눈물
... <25시>는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소설이다. 작가인 게오르규는 일제 식민지와 전쟁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 자신의 조국인 루마니아와 비슷하단 점에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25시>는 1967년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5시>는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대의 폭풍에 휩쓸려,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간 요한 모리츠의 인생 이야기다.
약소국이었던 루마니아 농부인 모리츠는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 스잔나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위협을 당하자 미국행을 포기하고 그녀 곁에 남기로 한다. 이후 쉽지는 않았지만 스잔나와 결혼도 하고 사랑하는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헌병소장의 모함으로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고 이유도 모른 채 13년 동안이나 기약 없는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코루가 목사의 아들이자 소설가인 트라이안은 기계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통해 현대문명을 비판한다.
"우리 개개인은 기계 노예의 사슬에 얽매인 채 죽어갈 거야. 내 소설은 그러한 인류의 종말을 그린 작품이 될 거고."
"제목은 뭐라고 붙일 건가?"
"25시." 트라이안이 말했다. "이것은 인류의 모든 구제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야. 메시아의 왕림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지. 이건 최후의 시간이 아니라 최후의 시간에서도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이니까. 이것은 서구 사회의 정확한 시간, 다시 말하면 현재의 시간을 뜻하고 있네." (p65~66)
잡힐 듯 안 잡히고 알듯 말듯 선명하지 않은 25시에 담긴 여러 의미들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먼저 제목인 <25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5시는 트라이안이 집필 중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25시란 단어가 책의 여러 부분에 나온다. 다음 부분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트라이안이 자그마한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 부분이다.
"주님, 제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제 힘으로는 더 이상 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제가 처해 있는 시간은 이제 제 삶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무거운 살과 피를 지니고 그런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25시, 그야말로 구원을 받기에도, 죽기에도, 살아가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인 것입니다. 실로 모든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
주님, 청컨대 저를 이대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하나의 돌멩이로 변모시켜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버리신다면 저는 죽을 수조차 없습니다. 저의 육체와 정신을 보시옵소서. 그 어느 것이나 죽음을 갈구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세상은 빈사 상태로 아직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유령도 아니고 산 사람도 아닙니다." (p380)
트라리안이 수용소에 갇혀 자신의 신에게 차라리 죽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절규를 토해내고 있다. 트라리이안은 그 순간 25시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25시는 자신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처럼 갇힌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의지 따위는 가볍게 묵살되어 버리는, 처음엔 육제가 갇히지만 점차 정신까지도 피폐해져,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간 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25시는 세상에 없는 시간이다. 다음이 있어 26, 27... 이렇게 시간이 흘러갈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시간이 될 수 있겠지만, 나아갈 수 없기에 그것은 절망의 시간이고 갇힌 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요한 모리츠의 탄원서 -
저는 루마니아의 판타나 마을 출신인 요한 모리츠입니다. (중략)
그래서 이제는 제가 왜 이처럼 갇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졌습니다.
'야노스', '이온', '요한', '야곱', 또는 '양켈'이라는 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까? 여러분들도 제 이름을 바꾸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바꿔보십시오. 이젠 나도 사람들이 세례받을 때에 얻은 이름을 지니고 살 권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려거든 서둘러 주십시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제가 체포되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통지차 여러분, 회답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며 농사꾼인
모리츠 이온(요한, 야곱, 양켈, 야노스)
"왜 우나, 모리츠?" 탄원서를 읽어보고 나서 트라이안 코루가는 물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는데...... 왜 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 탄원서를 보내는 것이 두려운가? 내가 쓴 것이 사실이 아니라서 그런가?"
"겁이 나서가 아닙니다. 이 내용은 전부 사실입니다." 모리츠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울어?"
"바로 그 탄원서 때문에 우는 겁니다. 그것은 진실 그 자체니까요." (p367~371)
모리츠에게 가장 큰 연민을 느낀 부분이다. 그렇게도 많은 수용소 담당자들에게 자신은 루마니아 출신의 요한 모리츠임을 말했어도 믿어주기는커녕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바꾸다니. 드디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고,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온전히 믿어주는 트라이안에게 얼마나 감사했을까? 자신이 보낸 고통의 시간들을 믿어주는 트라이안이 있기에 모리츠는 보상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탄원서가 진실 그 자체라는 모리츠의 말은 트라이안도 울게 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모리츠! 살아줘서 고마워요. 많은 고통의 시간을 견뎠고, 앞으로 행복할 거라는 장담은 못하지만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줘요. 당신이 살아있는 그 시간이 바로 당신의 삶이고 역사가 될 테니까요. 끝까지, 살아 내줘요. 모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