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나는 두 아이의 엄마지만, 30대 초반까지는 나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 20대 중반부터 독립에 대해 고민했고, 결혼은 부모님에게 제시할 독립을 위한 가장 타당한 이유였다.
배우자는 사랑의 감정보다 합리적인 기준으로 선택했다. 인생의 동반자와 가정을 형성하는 결혼의 본질적인 이유보다, 독립을 위한 결혼이었기에 배우자 선택에도 큰 망설임이 없었다.
나에게 온전히 맞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 역시 온전히 이상적인 배우자가 될 수 없다. 어느 만큼의 포용력을 갖고 상대를 이해하는지가 관계 유지에 핵심일 뿐이다.
결혼 후에는 아이를 낳아 가족의 끈을 더 단단히 엮고 싶었다. 자식을 키우며 치러야 하는 희생과 고난보다는 자식으로 인한 행복과 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결정했다.
모든 선택에는 장단점이 공존하며, 다만 내가 그 선택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출산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까지,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출산으로 인해 나라는 인간이 바뀌었고, 전편과 완전히 다른 인생 후편이 시작되었지만, 그 변화가 나를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명체를 0부터 시작해 독립된 성인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거웠다. 내가 그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기에 행여 실수를 할까 봐 두렵고 조바심이 났다. 다들 잘하고 있는데 나만 길을 잃은 듯하여 외로웠다.
힘든 육아의 과정에서 내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은 다행이다. 내가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 복잡함보다는 단순한 것을 선호한다는 것, 아이의 선택보다 내 선택을 고집한다는 것 등 아이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육아서와 육아 전문가들의 지침에 따른 육아는 실제 30퍼센트 정도 실천한 것 같다. 감정적인 인간이 그렇듯, 아이와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끊임없는 실수를 했다. 아이의 아이다움, 미숙이 성숙으로 가는 과정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로 인한 분노와 좌절, 실망과 자책은 현재진행형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생명체는 ‘유전자의 생존 전략’에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모성애도, 분노도, 결국은 유전자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행위는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본질은 유전자의 복제 욕망이다.
유전자는 생명의 근원적 단위이자 진화의 주체이다. 즉, 개체는 유전자가 자신을 복제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낸 ‘생존의 도구’ 일뿐이다.
개체가 희생하거나 이타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행동은 ‘유전자의 이기심’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모성애는 유전자의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감정 장치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강한 본능, 분노나 질투와 같은 감정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안전하게 후세에 전달하기 위한 ‘심리적 프로그램’이다.
현재의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 본능을 넘어, ‘삶의 질’을 더 깊게 고민하는 존재로 진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출산에 대한 선택은 유전자의 명령인 동시에 ‘삶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다. 한국을 비롯 대부분의 선진국들의 출산율이 급감했다. 유전자의 생존 본능이 이 세상을 유전자들이 번성하기에 위협적인 곳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생존하기에 보다 안전한 환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인공적으로 태어나는 인간의 세상이 곧 올 수도 있겠다. 시스템의 산물로 아이들이 탄생하고, 인간 유전자의 생존이 기술을 통해 실현되는 세계 - 작가가 의도했듯 디스토피아적이지만, 유전자는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니 말이다.
조물주가 모든 생명체에게 이기적 유전자를 심어 놓은 것은 그것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인류 후손들을 위한 이상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 - 인간의 유전적 본능이며 나와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