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놓을 수 없는 것들

by 작은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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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다른 길로 갈아탈까?


매일 아침마다 눈을 떠서 생각하는 말.



어렸을 때부터 그리는 것이 좋았고, 그렸을 때 남들이 칭찬해 주니까 더 열심히 그렸다. 내게 피카소 같은 특별한 1%의 재능이 있었던 것 같진 않지만 그림쟁이들이 흔히 그러듯 그냥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일단 남들 다 간다니까 대학은 가야겠고 좋아하는 일이 그림이니 자연스레 미대를 꿈꾸었다. 아침엔 공부하고 저녁엔 그림을 그리고 코피 터지는 입시 생활이 이어졌다. 그때가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 같은데, 꿈을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진짜 내 꿈이 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공부머리는 좀 있었던지 하늘이 도와 명문대 가장 경쟁률이 세다는 곳에 장학금까지 받고 입학했다. 당시엔 세상을 얻은 것 같았고 내가 분명 특별한 사람인가부다 했다. 과도 잘 맞고 학교생활도 재미있었다. 모범생답게 학교생활 진짜 열심히 했다. 명문대라 그런가 재능 있는 애들 많더라. 그래도 기죽지 않았다. 내겐 나만의 특별한 구석이 분명 있다고 믿었으니까.





근데, 졸업할 때쯤 달라지기 시작했다.

재능 있는 애들은 프리랜서로 졸업 전부터 자리를 잡고 일을 했다. 돈에 관심 있는 애들은 벌써 대기업 취준해서 칼같이 입사해 떠나갔다. 신기하게도 급한 마음이 들진 않았다. 또래 애들이 느낀다는 그 난제, '명문대 나왔는데 나 뭐 먹고살지' 정도는 고민하였으나 빨리 독립하여 자리 잡아야 한다는 위기감과 간절함은 별로 없었다. (뭘 믿고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들 많이 했다.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언어 공부도 하고. 여행 많이 다녔다. 급하게 안 가도 갈 길은 다 가게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아마 유복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부모님 품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휴학도 해가며 늦은 졸업을 조용히 하고 나와서 작가 일을 시작했다. 근근이 밥벌이는 하였으나 어디 이야기하긴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대충 산 건 절대 아니다. 돈 안 되는 일만 잔뜩 바쁘게 하고 다녔을 뿐이지. 그러다가 이 병, 류마티스 관절염을 만났다. 세상에, 이 젊은 나이에 손가락 관절염이라니!



평생 그렸던 그림인데. 작업만 하면 손가락이 붓고 손목이 아팠다. 손에 힘을 빼고 팔로 그려보기도 하고 아픈 손가락에 펜을 묶어 그리기도 했다. 근데 아무 소용없었다. 그냥 안 그려야 낫는 거였다. 드디어 그때부터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병으로 손가락이 아픈 무명작가. 모아놓은 돈은 별로 없고 집도 절도 차도 없다. 이전엔 젊음과 체력으로 때웠는데 이젠 그 체력이 없네? 거기다 아프면 다 돈인데 부모님 없으면 대체 나 혼자 어떻게 살아? 빨리 나아간 다른 친구들 따라잡으려면 달려도 모자랄 것 같은데, 몸은 자꾸만 내 발목을 잡았다. 처음으로 그림 택한 걸 후회했다. 나도 돈 되는 일 찾아갈걸. 공부는 좀 했었는데 의대 갈걸. 미리 자리를 잡고 돈을 모아둘걸...



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놓을 수는 없었다. 손을 쓰지 않는 일을 찾아보지만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림 외에 다른 밥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 가진 것을 탈탈 털어 뒤져봤는데 나 정말 별 볼일 없더라. 처음엔 화가 났고 다음엔 슬퍼서 눈물이 났고 그다음엔..


막막했다.




그래도 아직 나이라도 젊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근데 20대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흘러갔다. 눈 깜짝할 사이 앞이 3자가 되어버렸다.










3자가 뭐길래 사람을 현타 오게 하냐?




주변을 보니 친구들의 모습이 나와 비교되어 보였다.

다른 친구들은 돈 많이 모았을까? 얼마나? 집은 못 사도 차는 살 정도인가? 결혼해서 독립한 애들도 있잖아?


이제라도 취업해서 돈 벌 순 있겠지만 내 체력이 의심스러웠다. 지금이야 쉬는 시간이 많아 병 관리가 되지만, 바쁘고 스트레스받으면 금방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힘들게 다시 들어간 회사에서 병만 얻고 금방 나올까 봐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알바와 돈 안 되는 작업으로 어느 세월에 독립하지?


답 없는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도, 이어가야 해

이런 불안하고 정해진 거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있다.


치료에 집중해서 건강을 많이 회복했고, 덕분에 그림도 글도 다시 손에 잡을 수 있었다. 차근차근 놓쳐버렸던 것을 다시 잡아가고 있다.


내게 독립을 이루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인진 몰라도,

지금의 걸음 속도가 너무너무 느려서 지금처럼 불쑥불쑥 위기감이 솟아오르더라도,

평생 무명 신세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해도..



그래도 손가락 아프다고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기엔 나는 너무 뼛속까지 그림쟁이다. 내게 딱 하나 있는 무기가 지구력인데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나도 가봐야 알 거 같다. 아직까지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다. 아직도 현실의 몰매를 덜 맞았나 보다.









-3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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