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질문들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지만,
정이는 냉담하게 식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내가 너무 냉정한 사람인가? 슬픔에 잠겨 위로를 구하는 사람을 뿌리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잔인한 이기심인가? 아니면? 혹시 이 사람. 자기만의 구애 방법인가? 자신의 민낯을 모두 내게 보이면서 나 또한 그래주길 바라는건가? 아니면 손을 맞잡고 같은 맘으로 슬퍼해 주고 토닥토닥 해야 되는건가? 그가 아니라 그녀였으면 어땠을까? 나이가 나보다 적은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내가 지금처럼 냉정하게 자꾸 시계만 보았을까? 원래 사랑의 시작은 이렇게 구질구질 칙칙한 것일까?'
그 밤. 먼동이 틀 때까지 정이는 수 많은 시나리오를 쓰느라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드디어 아침에 내린 결론.
'친구는 할 수 있다. 서울생활. 직장생활에 서툰 그를 조금씩 도와 줄 수는 있다. 그 이상은 안 되. 연애도 안 되고 사랑은 절대 사절.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친구라니 그 또한 어려운 일이다. 모름지기 친구라면 희노애락. 속 얘기도 많이 하고 밥도 먹고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데- - - 더구나 그는 같은 회사에 있는 싱글남이니-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연애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 - 그렇다면 끊자. 앞으로는 사적인 시간은 갖지 말자- - - 노- -노- - '
그의 데이트 신청쪽지를 구겨서 버렸다.
그 다음도- - 그 다음도- -
'꼭 만나고 싶어요. 할 말 있어요- -'
정이는 이렇게 한 사람의 진심을 구겨서 버리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 생각하며 죄스러운 기분이 들어 몸을 떨었다. 그가 빨리 나를 지나가 줬으면- - 바랬다.
'니가 그렇게 잘났냐? 나도 잘 났다. 치사하고 치사하다. 잘 먹고 잘 살아라- - '
차라리 화라도 벌컥 내며 씩씩하게 가버렸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