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내 앞의 생(길수 이야기)

by 김정욱


1-15. 리셋-나에게 지금 필요한건 포맷인가?

모르겠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억들을 하루 빨리 잊어야 내가 살 수 있다. 내 선택으로, 내가 스스로 한 결정으로 오늘 이곳에 내가 있다. 그러나 어쩐지 억울하고 참담한 기분이 들어 자꾸 목이 메어온다.

내게는 두 아들이 있다. 아내는 오 년 전에 먼저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 난 아직도 아내가 간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이생에서 떠돌고 있다.

작은 아들과 요양원에 도착하던 날, 눈부신 햇살을 받고 당당히 빛나고 있는 기쁨요양원 간판을 마주한 순간 생뚱맞게 화가 치밀었다.


'늙은이 세상에 뭔 기쁨이야, 기쁨이. 누굴 놀리는 거얏?'


요양원은 시내를 벗어나 산 하나를 완전히 돌아간 깊은 산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면 청정한 곳이라 생각하겠지만 길수는 그곳이 빛나는 감옥으로 보였다.

큰 아들은 공부를 한다고 외국 어딘가로 나가더니 영 들어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놈이 하고 싶었던 공부가 아직 덜 끝난 건지, 아님 딴 길로 새서 들어 올 수 없게 되버린건지 내막을 알 수 없었다. 처음 몇 년간 생활비라도 부쳐 줄때면 어떻게 지내냐? 공부는 할 만 하냐? 묻기도 했지만 햇수가 지날수록 길수도 자신의 생활이 힘에 부쳐 푼돈조차 주지 못하게 되자 어떻게 돼 가느냐? 언제 돌아 올 거냐?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잘못되지 않고 어쨌든지 열심히 살고 있기를 바랐다.

큰 아들이 나에게 기쁨이요, 희망인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르게 영리한 아이였다. 선생님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어른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잘 알아챘다. 아내 명희는 똑똑한 큰애보다 어리숙한 작은애를 편애했다. 하긴 큰 녀석은 길수가 싸고돌면서 세심하게 신경 쓰고 그때그때 적절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저와 다른 녀석이 기특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많이 자랑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작은애 기억은 별로 없다. 큰 녀석 생일에는 케익도 많이 사 날랐는데 작은 녀석 생일은 제대로 한 번 챙긴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그를 나무라며 명희는 작은 녀석을 많이 안쓰러워했다.


다행인지 성격이 좋은건지 녀석은 별 탈 없이 제 스스로 제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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