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자

by 김정욱

23-23. 내가 가진


재능이 있다면 그걸 잘 키워 보고 싶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 시작하기에 늦은 때란 없다는 걸 명자는 잘 알고 있다.


"집이랑 우리 식구 몇 달 생활비만 남기고 다 줄께 - - 난 일본에 있는 제과학원에 등록했어. 과정은 일 년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걸릴지도 몰라 - - 한 이 년쯤. 내 생활비는 벌어서 쓰면 되. 나 생활력 하나는 강하잖아. 명훈이도 대학 입학만 하고 바로 입대하기로 했고. 우리 신경 쓰지 말고 - - 일 처리 잘 하고 - - 몸 상하지 않게 건강 잘 지키고 - - 몇 년 후에 다시 만나서 - - 행복하게 잘 살자 - - 우리"


지훈은 명자 명훈을 꼭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래그래 - - 음 - - 알았어. 우리 각자 열심히 잘 살자. 꼭 좋은 날 있을꺼야 - - 흠 흠 음 - - 미안해 정말 정말. 사랑해 - - 명자 명훈아 - - "


지훈은 자꾸 목이 메었다.


"아빠. 식구끼리는 미안하다는 - -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래 - - 이제보니 아빠가 울보네. 엄마랑 난 씩씩한데 - - "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변제하지 못한 대금은 '장기차용증'으로 대신했다.

지훈은 자신을 믿어준 화주들의 고마움에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주인이 바뀌어버린 자신의 화물차를 임대해, 먼동이 트기 전 깜깜한 새벽에 화물터미널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지훈과 명훈의 전송을 받으며 일본으로 떠나 온 명자는 여유없는 유학생활로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다.

군대에 있는 명훈은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서 잠시라도 게을러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운전면허증도 따고 이 것, 저 것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군대 환경도 많이 좋아져 일과시간이 끝나면 온라인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자신이 하루빨리 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멋진 아빠, 용기 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우리 식구,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지 - -


'내 인생.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갖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었어 - - 결혼을 하건 안하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 뻐근하고 목울대가 뜨겁도록, 온 맘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거지 - - 시련은 우리 사랑을 더 단단하게 해줄꺼야 - - '


명자는 손꼽아 가족상봉을 기다렸다. 끝.



'명자'씨를 처음 만난 건 37년전.

야무지고 당찬 부산아가씨. 귀염성 있는 얼굴에 말도 빠르고 몸도 빠르고 손도 빨랐다.

여러모로 나와는 결이 아주 다른 사람이어서 친해지기 어려웠는데 - -

어쨌거나 '명자'씨는 신기한 사람이었는데, 당시에도 '돈 버는'일에 아주 열심인 사람, 이미 사업가 마인드가 장착된 사람이었다. 보기엔 이리저리 재다 혼기를 놓친 사람인데 본인은 '비혼'이라 당당히 주장했다.

아, 참. 그 때는 '비혼'이란 말이 없었다. '독신주의'라 했다.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 편하게 이 말, 저 말 하게 되었을때, '명자'씨는 조용히 속닥였다.

'아이는 낳고 싶어 - - '

왜 아니겠는가? 막내동생까지 모두 결혼하고, 조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걸 지켜보면서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일도 있다는 현타가 온 듯. 첨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어 속으로 뜨악했는데 - - 누가 들어도 황당무계 부도덕한 말인데 - - 면 전에서 무슨 얘기하냐고 면박 줄 처지도 아니어서 어물어물 애매하게 흘려버렸다.

몇 년 후, 뜬금없이 임신 소식이 들렸고, 아이 아빠랑 결혼했다. 아이 아빠는 이혼 남, 그럴듯한 외양만 빼면 내세울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 - 아마도 바람둥이었을 꺼란 가족들의 추측.

어쨌든 아이가 중학교 들어 갈 즈음, 이혼을 감행.

그 때만 해도 자식 있는 여자가 이혼은 한다는 건 - 당하는 게 아니라 -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가족 안에서도 사회적으로도 이해 받기 어려웠다.

모든 걸 싹 정리하고, 부산생활을 청산, 고향을 떠나 아들과 단둘이 서울 행.

서울은 부동산 값이 비싸니 수원쯤에 정착. 부동산업자로 변신. 부를 축적하고 아들은 사교육으로 푸시. 서울 유명 사립대 보내고 유학도 보냄. 돌아 와 대기업 입사. 현재, '명자' 본인은 건물주가 되어 골프치고 여행하고 - - 잘 사는 중.

3남 3녀 중 4째 '명자'씨. 형제 중 '명자'씨처럼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가문의 전설이 된 '명자'씨. 지금은 칠순 중반을 넘어 팔순이 낼 모레. 아직도 팔팔, 거뜬하여 필드에 나가신다고.

이쯤되면 이 말 쓸까, 저 말 쓸까 고르고 애태우던 수고는 초라해질 지경.

사실, 실제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래도 내가 추앙하는 건, 그 녀 '명자' 맘 속 꼿꼿히 버티고 있는 자존감, 의지, 순수.

그 녀 인생에도 비, 바람, 눈물이 있었을 터, 실제 부산을 떠난 후, 거의 십 몇년간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승리했다.

원제는 '브라보, 마이라이프'인데 너무 길어서 '명자인생'으했다가 '명자'로 바꿨다.

'명자' 그 녀의 서사. 팩트가 더 감동이다.

어찌 감히, 한 사람의 인생을 허술한 필력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난 그저 그 녀의 젊은 시절, 순수 또는 진심 또는 의지 또는 자존감에 다가가려고 노력했을 뿐.

시대를 앞서간 그 녀, 인생에 굴하지 않고 언제나 씩씩하게 살아 낸 그 녀.

리스펙! 조 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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