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 "말 좀 해 봐"
"여태까지 당신, 말을 속 시원히 한 적도 없었잖아. 내가 그렇게 정 떨어지는 놈이야? 그런거야? 뭐는 싫다. 뭐는 아니다. 딱 부러지게 얘기 하라구. 내가 고칠 수 있는 거는 고쳐볼께"
"아니. 당신 잘못은 없어. 내가 못나서 그래. 바보라서"
"너무 내 생각만으로 밀어부친 거 인정해. 그리구 미안해. 그치만 나 좀 이해해 주면 안 되는거야? 요즘 가게 일도 그렇구 신경 써야 될 일도 많구 나도 죽을 맛 이라구"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힘이 좀 들어서 그래. 누군가 더불어 살기에는 너무 힘에 부쳐. 나 좀 놓아주면 안돼?"
"그딴 말 같지 않은 얘기 자꾸 할래? 장인어른이 당신, 병원에 데리고 가보라고 하시더라구. 뭐 우울증인가 뭔가. 의사들이 뭐 알아? 자기 맘은 자기가 잘 아는 거 아냐? 내가 도와 줄테니 말을 해 봐"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혼자 지내고 싶어. 그게 내 소원이야"
"쳇. 미인 마누라 얻은 값을 톡톡히 하는군. 친구들이 그래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하루라도 당신 같은 사람하고 살아보고 싶대나. 내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 내가 이렇게 푸대접 받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 난 할 말이 없어. 당신한테 너무 면목이 없어서"
"기다려 봐. 먼 친척 형님이 산골에서 과수원을 하셔. 조그맣게. 동네가 하도 작아서 사람도 별로 없구. 노인네들만 몇 명 살아. 아마 하루종일 사람구경 하기도 힘들껄. 당신이 가 있을 수 있는지 알아 볼께"
또다시 명자의 시간은 속절없이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