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 그즈음이었다.
어린시절, 시골 살던 꿈을 연이어 꾸었다. 반짝반짝 온세상이 빛나던 시절, 무엇이 서러운지 명자는 끅끅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명자야. 잘 지내니? 나, 은이. 오빠가 많이 아파. 치료도 안 받고 무슨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어. 웃기지 않니? 자기도 죽어가면서 봉사는 무슨. 미친거지. 봄에 만났는데 네 얘기를 하더라구. 보고 싶은 눈치야. 한 번 만나주면 안될까? 니 사정도 모르고 부탁하기가 좀 그렇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구. 오게 되면 나한테 연락해. 같이 가게"
이십년 만에 친구 은이의 전화를 받고 단번에 그 시절 그 맘으로 돌아갔다.
'우린 왜 이럴까? 남들은 이별을 하고도 잘 들 사는데. 우린 바보 같이 아프고 멍들고 세상에서 겉 돌기만 하는 걸까?'
재운은 까맣게 그을리기는 했지만 눈빛이 좋았다.
이 세상 고통의 강을 뛰어 넘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한 평온함이 있었다.
"명자야. 잘 지내지? 난 괜찮아. 꼭 한 번 보고 싶었어. 난 괜찮다고. 그러니 넌 니 생각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바보야. 그게 아니잖아. 그 때, 우린 같이 도망이라도 쳤어야 했다구. 그러면 이렇게 서로 아프게 살지 않았을꺼 아냐?"
"아냐, 아냐. 그 땐 우리가 너무 어렸구, 힘이 없었구 겁이 났어. 언제나 어른들은 옳았구. 그게 최선이었어"
"아니야. 아니거든. 아니거든! 절대! 최선이 아니었다구! 우린 용기가 없었구 비겁했어. 그 뿐이야. 그래서 우리는, 아니 난 평생 아프게 살았다구. 그 벌을 아직까지 받고 있구"
명자는 소리소리 쳤다. 지금까지 꾹꾹 눌러온 온 갖 설움들이 한꺼번에 제대로 폭발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재운 앞에서 토해내고 싶었던 뜨거운 핏덩이 같은 명자의 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