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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by 김정욱

8-13. 다행히 신혼집이 멀지 않아 걸어서 10분 거리.


직장생활에 바쁜 니가 살림에 힘들테니, 저녁은 같이 먹자고 내가 말하니까 니가 웃으며 말했지.

"엄마, 고마운데 가끔요. 가끔만 올께요. 한 서방이 불편하니까. 그리고 엄마도 일을 하는데 우리들까지 폐 끼치고 싶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살께"

틀린 말 하나 없이 똑 떨어지게 말을 하는데, 역시 내 딸이구나 싶더라.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흐믓하기도 했단다.

맞아. 니네 인생은 니네가 사는 게 맞는거야.


텅 비어버린 공주 방을 열어 보며, 니 아빠는 말 했단다. 우리 공주가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나중에 아빠랑 결혼 할꺼야. 그러더만 다 뻥이었다고. 내가 약 올렸지. 그걸 이제 알았냐구.

그래도 아빠 손을 조물락거리면서 '아빠, 천원만, 천원만 주면 안 돼?' 그러던 때가 많이 그리운 모양이더라.

하긴 니가 아빠랑 많이 친하기는 했어.

택시 운전을 하는 아빠한테 전화 해서 차도 잘 얻어 타고, 필요 할 때마다 아빠를 잘 이용했지. 이용 당하는 아빠도 좋아 했고. 어쨌거나 덕분에 공주를 사랑하던 맘이 엄마한테 돌아왔어.

아빠가 일을 쉬는 날, 엄마랑 운동도 같이 나가고, 마트에 장 보러도 같이 다니고, 옛날 연애시절이 떠오르더라. 아이들이 모두 출가하고 엄마 아빠만 남으니 숙제를 다 끝낸 것처럼 후련하기도 하고 인생이 많이 가벼워진 느낌이야. 이젠 아프지 말고 재미나게 살자고, 니 아빠랑도 얘기 했지.


니가 결혼한 그 해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지.

보일러에 전기요까지 켜 놓고도 실내가 썰렁했으니. 니가 사는 아파트는 새 것이라 단열이 잘 된다고 해서 그나마 마음을 놓았단다. 아이들이 춥다고 하면 우리 맘이 더 추울테니.


어쨌거나 너는 씩씩하게 직장생활도 잘 해 나가고, 가끔씩 보여 주는 얼굴도 밝아 보이고, 니 밝은 얼굴을 보면 엄마 아빠는 절로 행복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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