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그날은 달이 휘영청,
보름이었다. 민수 형님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이런 저런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몸이 노곤해져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낮에는 없던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누군가 쓰레기를 몰래 내다 버린 모양이다. 플라스틱 박스 인지 뭔지에 발이 걸려 자빠지고 말았다. 허리가 나갔는지, 엉치가 부서졌는지 숨이 컥 막히고 머리끝으로 타는 듯 통증이 솟구쳤다. 아악!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한동안 누워 있었다. 어찌어찌 엉금엉금 기어 집에 들어가 누웠다. 평생 끌고 다녀도 아파 본 적 없는 몸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윗도리 주머니에 들었던 휴대폰이 없다. 아마 그곳에 흘린 모양인데 찾으러 다시 나갈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중만아! 이놈아! 애비 죽는다!"
다짜고짜 작은놈한테 한마디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튿날, 점심때가 돼서야 작은 아들과 병원을 갔다. 사진을 찍어보니 다행이 부서지지는 않고 엉치뼈에 금만 갔단다. 당분간 움직이지 말고 있으란다.
누워 있으니 또 인생이 허무해진다.
한동안 모른 체 하고 지냈던 그 쓸쓸함이 되살아나 다시 처량 맞은 늙은이가 되었다. 아, 언제까지 살아야 되나.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하루 빨리 죽음의 종착역 그곳에 도달하고 싶었다. 애쓰면서 웃음을 만들고 생기를 지어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 고단했다.
'인간은 혼자서는 못 사는 거야. 사람 인(人)자처럼 서로 기대고 살아야 하는 거지"
중학교 때 한자선생님 말씀, 그 말씀이 진리였다.
나는 자주 힘이 빠졌고 지쳤다. 누군가의 말처럼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 온 사람마냥 저절로 무너졌다.
매일 저녁 작은 아들이 퇴근 하고 집에 들렀다. 그녀석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회사 가까이 원룸에 산단다. 친구와 둘이. 좋은 놈이어야 할 텐데 또 쓸데없는 걱정이 든다. 애비와는 할 말이 없는지 얼굴 한 번 쓱 보고는 주방에 들어가 제가 사온 죽을 냉장고에 넣는다. 위장은 멀쩡한데 웬 죽이람. 꼼짝않고 누워 있으니 죽이 맞는건가? 어제는 목욕탕이 더러운 지 쓱쓱쓱 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같은 날, 비도 부슬부슬 오고 아들놈과 맛있게 튀겨진 통닭 한 마리 앞에 놓고,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역시 말을 꺼내지 못한다.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해지고 싫어지고 종내는 슬퍼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