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마음을 비우리라.
아무것도 바라거나 희망하지 않으리라.
실망도 하지 않을 것이고 상처도 받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외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큰 아들에게도 꼭 말해 주고 싶다. 아빠는 괜찮으니 너만 잘 살면 되. 아빠는 됐어.
살살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작은 아들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이제 매일 안와도 된다. 그리구 너만 좋다면 들어와 살아도 된다. 빈방도 있구"
"아녜요. 됐어요"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언제쯤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서운함이 또 든다.
오랜만에 노인정에 들르니 민수형님이 누워있었다. 눈자위가 시커멓게 가라 앉아 있다.
"왜요? 뭔 일인데?"
"나. 그냥 빨리 죽고 싶네.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어. 애들도 보고 싶고. 죽은 마누라도 꿈에 보이고"
"자자. 그러지 말고 우리 오랜만에 몸보신이나 하러 갑시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맘 붙일 것이 필요하다.
당장 낼 아침 어떻게 될지 모르는 늙은이는 먼지 같은 존재다. 있던 자리마저 감쪽같이 사라지는 먼지 같은 존재. 아이들을 키우며 분주하게 일했던 젊은 때, 오늘의 나를 상상이나 했던가. 나는 요즘 요양원 생각을 자주 했다.
"혼자 궁상맞게 지낼 거면 차라리 요양원이 나아요. 깨끗하고 돌봐줄 사람도 있고"
죽기 전 명희가 종종 말했다.
서투른 인터넷 검색으로 이곳저곳을 찾아보았다. 병들고 아픈 늙은이가 가는 곳도 있고, 거동이 가능한 늙은이만 모여 사는 곳도 있었다. 보증금도 있고 생활비 얼마는 매달 지불해야 한단다. 이제 요양원이란 곳으로 가게 되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자고 단체 생활인이 되는 건가?
평생 안 먹던 호박, 가지, 오이, 참외, 조개, 생선을 먹어야 할 일이 생길 거고, 맛있는 단골 통닭집도, 든든하게 배를 채워 주던 국밥집도, 일 끝나고 시원하게 마시던 맥주도 이젠 내 인생에서 사라지리라.
민수 형님과 한 잔 걸치면서 이런 저런 수다도 떨지 못 할 것이며 내 발로 어디든 싸돌아다니며 기웃대지도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