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 소설이 지닌 미학 그 자체 <두 도시 이야기>

[독후감]

by 낭낭

어렸을 때 해외에 살았을 때 영어로 된 찰스 디킨스의 원서를 샀던 적이 있다. 표지가 예뻐서였던가, 두꺼운 책을 읽으며 나의 자존감을 높이고 싶어서였던가. 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책은 책장 안에 오래 꽂혀 있었다. 얼마나 꽂혀 있었는지 가물가물해진 찰나에 먼지를 털고 책을 꺼내 읽어 보았다. 첫 장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아주 긴 문장이었고 한글도 아닌 영어로 이를 먼저 접한 나는 그 문장이 지닌 깊이와 의미는 헤아리지 못한 채 피로를 느끼며 책을 덮었다. 그 책은 그대로 다시 책장 안으로 들어갔다. 햇빛을 만나 바랠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펼쳐지지 못한 채로 녹슬어 갔다.


그 책을 이번에는 기필코 읽어보리라 다짐을 하고 도서관에서 찾아 빌렸다.(슬프게도 원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지금 그걸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도 모르겠음 또륵) 몇 해 전 완독을 단념케 했던 첫 문장을 마주했다. 세상에. 정말이지 긴 문장이다. 정말 길다. 그러면서 세상이 지닌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현상들을 다 담아내는 문장이었다.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고,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등진채로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中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문장을, 이런 통찰력을 지닐 수 있는 거지. 솔직히 잘 읽히는 첫 문장이냐고 물었을 때 나에게는 아니다.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 나같이 직관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확 들어오는 문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게, 참,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돌아보면 진짜 세상의 모든 이치,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말 엄청난 문장임을 알 수 있었다.

daniela-muntyan-gCR-PQ04K9A-unsplash.jpg 디킨스 아저씨, 아저씨는 정말 천재셨나요? 어떻게 글을 이렇게 쓰시죠. 정말이지 놀랄 '노'자랍니다.


깊이 생각해볼 사실 하나,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심오한 비밀이자 수수께끼라는 것.
밤에 대도시에 들어설 때면 숙연하게 떠오르는 생각 하나,
저기 시커멓게 옹기종기 서 있는 모든 집들이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 모든 집의 모든 방도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곳의 수십만 가슴 속에 뛰고 있는 심장들도 저마다의 생각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심장에게조차 비밀스러운 존재라는 것!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中


소설은 프랑스를 찾아가는 영국의 텔슨은행 직원 로리를 따라가며 시작된다. 불안한 시절임을 암시하는 책의 초반부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깔린 채로 시작되며 로리를 찾아온 제리라는 정보원에게 "되살아나다"라는 전보를 전달해 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책을 읽다 보면 수년 동안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마네트 박사라는 인물이 사실은 살아 있고 그를 찾으러 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독방 안에 갇힌 채로 신발을 수선하며 세월을 보내온 마네트 박사는 드파르주라는 포도주 상점을 운영하는 주인의 집에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있었고 그 앞에 그의 존재를 처음 보는 딸과의 만남은 비밀스럽고 신비롭게 이루어진다.


도대체 왜 이 사람이 갇혀 있었던 거지 궁금해하며 성격 급한 한국인들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할 때 책은 갑자기 2부로 넘어가면서 몇 년 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루시 마네트와 마네트 박사는 법정의 증인으로 서게 되고 찰스 다네이라는 남자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법정에 나타나게 된다. 이곳에는 텔슨 은행의 정보원인 제리가 등장하고 찰스 다네이의 결백을 주장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카턴이 있다. 술에 찌든 채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카턴과 다네이의 결백을 주장하는 변호인 스트라이버는 결국 승소하고 다네이는 승리하게 된다. 엄청난 미모로 카턴과 스트라이버, 다네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루시 마네트는 결국 다네이와 결혼을 하게 된다. 프로스라는 하녀는 이들의 결혼을 아쉬워하는데 그건 자신의 동생과 잘 되었으면 하는 어느 누이가 가질 법한 마음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언급할 수 있겠다. 한 편, 프랑스에서는 마네트 박사를 구해준 드파르주 부부가 프랑스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을 비밀스럽게 계속 보여준다. 어쨌든 다네이와 결혼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마네트 집안은 루시를 닮은 딸을 하나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 이 모든 정보는 3부를 진행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스티유.png 프랑스 대혁명 바스티유 감옥 습격


3부는 프랑스혁명의 모습들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 속에서 찰스 다네이, 루시와 마네트 박사, 드파르주 부부, 프로스 부인, 로리, 카턴 등의 모든 인물들이 어떻게 엮이고 사건을 타개하는 지를 보여준다.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으면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눈앞의 문제들을 타개할지 애태우게 만든다.


찰스 디킨슨은 이 책에서 2부에 언급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삶과 생각, 삶의 태도 등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전혀 쓸모없는 내용이 아니라 이 클라이맥스를 위해 필요한 정보들임을 다 알게 된다. 스포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그렇지만 그냥 이 책은 거의 뭐. 그냥 떡밥 회수의 로드맵이라고 할까. 허튼 정보, 쓸데없는 정보가 하나 없이 내가 지금껏 읽어온 모든 내용이 마치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책 읽는 내가 죽어가는 중인가 착각이 들 정도...

진짜 이건 미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이야기를 펼치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이를 드러내는 방법. 우와.

미친 수사다. 문장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문장이 이렇게 비유가 철철 흘러넘칠 수가 있다니. 종교와 삶을 엮으면서 사회를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인간 자체가 담은 모든 모순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하지만 생각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무서울 수 있는지. 행해졌던 모든 악행들이 얼마나 무섭게 돌아오거나 더 무섭게 후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우리는 이상과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희생시키고 정당화를 시키는지. 백몇 년이 지난 책을 통해 아직도 현실을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부분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성장을 하는 데에 더딘지.

그냥 말을 해도 해도 미쳤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심해급의 깊이를 가졌어....


책을 읽고 언니한테 감탄을 늘어놓았다. 너무 엄청난 책이라고. 언니는 디킨스는 계속 읽어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책이라고 언제 읽어도 좋기로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상황과 이야기에 집중하며 책을 읽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을 때 그 속에 있는 비유와 수사에 대해 더 생각하고 감각하고 해석하면서 읽을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없이 그저 문장을 보며 우와,,,,하며 감탄할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두 사람은 빠르게 줄어드는 희생자들 가운데 서 있지만, 마치 단 둘이 있는 듯 이야기한다.
눈과 눈을, 목소리와 목소리를, 손과 손을, 마음과 마음을 마주한 채,
대지의 어머니가 낳은 이 두 아이는 나머지 면에서는 너무 동떨어지고 다른 존재이건만,
이제 어둠의 길에서 서로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 속에서 쉬려 한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中


아, 이 책을 또 읽을 거냐고 물으면 무줘건. 이건 진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해석의 여지가 아니라 그냥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미친 글이야. 진짜로.

미친 글이여 언젠간 다시 당신에게 잠식되리라, 그날에 다시 만납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