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마율 Apr 03. 2021

어정쩡하고 사랑스러운 인간을 말하는 방법

그레타거윅 감독 영화<레이디버드>(2017), <작은 아씨들>(2019)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레타 거윅은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에 각본과 출연을 동시에 맡아 연기력과 작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단독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 <레이디 버드>다. <레이디버드>는  '레이디 버드'라고 불리고 싶은 크리스틴이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레이디 버드>역시 직접 각본을 써서 이전 작품처럼 자전적인 이야기를 삽입해 꿈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란 주제 의식을 담았다.

 두 번째 작품인 <작은 아씨들>은 다른 개성을 가진 네 자매가 어려운 환경과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고 독립적인 인물로 거듭나는 이야기이다. 이전에도 수차례 영화화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이 원작이다. 유명한 소설을 영화화하면 원작을 해치지 않기 위해 감독의 가치관과 생각의 개입이 최소화될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레이디 버드>보다 <작은 아씨들>에서 감독의 가치관과 관객에게 전하는 주제의식이 시각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레이디 버드>는 이전까지 각본가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첫 작품이기 때문에 서사와 대사가 큰 의미를 만들어 낸다면, <작은 아씨들>은 오히려 이야기가 정해져 있어 그 안에서 작가의 생각과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미장센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창작한 작품과 이미 원작이 있는 이 두 작품에는 공통으로 나타나는 주제가 있다. 이 주제를 어떤 미학적 특징을 통해 나타냈는지, 이를 통해 그레타 거윅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방향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한다.  



성장 영화

 두 작품은 모두 아이들이 성장하며 겪는 과정을 담은 ‘성장영화’다. 아이들은 기성세대와 충돌하고, 진로를 고민하고, 밝은 미래를 바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을 견뎌내야 한다. 영화 속 캐릭터는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자란다. 그러나 그들의‘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자신이 원하는 욕망에 도달하고,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믿는 상으로 자신을 꾸며내도 그 이상적인 모습은 실제 자신의 모습과 정체성이 아님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두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과 공간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정체성과 실제 자신의 정체성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셰릴과 크리스틴

 담배지만 담배 같지 않은 ‘허브 담배’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쫓겨나 남자 친구 집에서 사는, 가족과 가족이 아닌 관계 사이에 있는 셰릴과 닮아 있다.






 학급에서 인기가 많고 우상이 되는 무리와 어울리려 해도 무리와 크리스틴은 결이 다르다. 크리스틴의 머리에는 소속하고 싶은 집단 아이들의 머리에 달린 파란색 리본 사이에서 유독 튀는 붉은 리본이 매달려 있다.




크리스틴이 원하는 집(왼쪽)과 대비되는 현실의 집(오른쪽)

 크리스틴이 크고 멋진 주택에서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도 철길 옆에 있는 하찮은 자신의 집(wrong side of the tracks)은 결국 들킬 수밖에 없다.


 <작은 아씨들>은 원작대로 콩코드가 주인공 조의 고향이고,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감독의 실제 고향인 새크라멘토에 거주한다. 두 작품 주인공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뉴욕이라는 도시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틴은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뉴욕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다. 생각보다 즐겁지 않은 크리스틴은 낯선 뉴욕 도시에서 고향 새크라멘토와 가족들을 발견한다. 조는 작가라는 꿈을 안고 뉴욕으로 상경하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주간지에 오르는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써넣지 못한다. 자전적 소설에 넣고 싶지 않았던 ‘여성의 삶이 결혼 혹은 죽음으로 끝나는 글’을 출판사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포함해야만 자신의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물들은 그 소품을 활용함으로써, 그 공간에 도착함으로써 이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실과 정체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단순히 이상을 좇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목표를 발견하고 타협하는 방법을 알아가며 비로소 성장한다.  이때 성장하는 인물은 성공과 실패를 오가면서 시작과 끝이라는 이분법적인 극단에 서있는 게 아닌 과정과 과정 사이에 놓인 불완전하고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관객들은 수미상관의 화면 구성을 통해서 캐릭터들의 변화와 성장을 곱씹을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의 공간과 캐릭터가 영화 결말 부분에 유사한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레이디 버드>의 초반부 한 장면은 트래킹 쇼트 혹은 정지된 이미지로 찍은 풍경과 운전하고 있는 크리스틴의 엄마 매리언의 얼굴을 정면 클로즈업하여 매리언이 새크라멘토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을 고요하게 담아낸다. 영화의 결말인 크리스틴이 뉴욕에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며 진심을 전하는 장면은 크리스틴의 음성을 음향으로 넣고 초반부처럼 크리스틴의 정면 얼굴이 클로즈업된 쇼트와 풍경 이미지가 교차하며 새크라멘토를 감상하는 크리스틴 얼굴에 집중한다. 쇼트가 바뀌면서 크리스틴의 얼굴은 매리언의 얼굴로 바뀐다. <작은 아씨들>은 출판사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어두운 조의 뒷모습으로 시작해서 창문 밖으로 자신의 책이 제작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조의 밝은 앞모습으로 끝이 난다. 

 영화 초반부와 결말 부분 모두 같은 공간에 같은 캐릭터가 놓여있음에도 그 위치에 선 인물의 심리와 상황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크리스틴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던 엄마의 심정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원고를 팔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과 걱정인 시달리던 조는 마지막에는 자신의 책을 안고 책이 대량으로 제작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기대감과 벅참이 서린 표정을 짓고 있다.

 영화의 서사를 따라간 관객들은 캐릭터가 내면의 변화를 맞이한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 봤던 장면과 유사한 후반 장면으로 보는 관객의 내면에도 다른 감정들이 생긴다. 


편집을 통한 새로운 의미 창출

  두 작품은 몽타주를 사용하여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은 대상의 유사성을 통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익숙한 새크라멘토를 떠올린다. 영화 후반부 장면은 뉴욕에서 목격한 광경과 크리스틴의 미묘한 표정을 교차한다.  이 몽타주는 관객들에게 크리스틴이 성당에서 어린 성가대의 합창을 보며 미션스쿨에서 뮤지컬을 하던 자신의 모습을, 병원에서 마주 보고 있는 동양인 아이를 보며 자신의 오빠를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크리스틴과 매리언이 운전하는 장면 역시 몽타주로 ‘크리스틴의 심적 변화’라는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과거 장면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교차하는 두 쇼트를 보며 크리스틴의 심리를 유추하게 된다. 크리스틴과 함께 과거를 떠올린 관객들은 크리스틴이 느끼는 그리움, 미안함 등의 감정을 이해 할 수 있다.


 <레이디 버드>에서도 조형적 유사성을 이용한 연속적인 편집이 이뤄졌지만, <작은 아씨들>에서 이 편집은 쇼트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것을 넘어 결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작은 아씨들>은 네 자매가  모여 살던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되어 각자 삶을 살아가는 현재를 비선형적으로 배치한 서사 구조를 취한다. 이때 위에서 말한 조형적 유사성을 이용한 연속 편집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기 때문에 점프컷처럼 튀지 않지만, 오히려 시간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대신 시간 전환을 알 수 있게 하는 요소로 배우들의 연기와 색온도를 사용한다. 과거에 자매들은 발랄하고 시끄럽고 천진난만하여 감정이 과장되게 표현된다. 현재는 침착하고 조금은 울적한 분위기로 연기를 이끌어간다. 과거 장면은 전반적으로 따뜻한 호박색을, 현재는 비교적 어둡고 푸른 색온도를 띄기 때문에 영화를 보다 보면 현재와 과거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서사가 절정에 다다를 때까지는 주인공 조의 심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쇼트의 색온도가 구분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말부에 가면 색온도와 연기가 상반되는 장면들을 충돌하면서 결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조가 어쩔 수 없이 여성 주인공이 혼인하는 결말로 책을 내기로 협상하는 장면 다음으로 조가 프리드리히와 이어지고, 가족들이 모두 콩코드로 모여 즐겁고 화목하게 사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은 현재 시점임에도 따뜻한 색온도를 지닌다. 그리고 영화가 전체적으로 빠른 쇼트 전환과 바스트, 미디엄 쇼트였던 것과 달리 유독 롱쇼트에 딥 포커스, 롱테이크 등의 영화적 기법을 사용한다. 이와 대비되게 뉴욕에서 책이 제작되고 그 모습을 조가 지켜보는 과정은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짧은 쇼트 전환으로 이뤄진다. 콩코드의 장면과 뉴욕의 장면은 서로 충돌하며 두 장면의 상황과 분위기는 더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영화가 제시한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보면 영화의 결말은 조는 고향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가족들과 함께 학교를 세워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편집의 의도를 고려해본다면 색온도가 사실 조의 현실 (차가운 색온도)과 조가 쓴 ‘작은 아씨들’(따뜻한 색온도)의 이야기를 구분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영화 서사는 단순히 조의 과거에서 현재의 흐름이 아니라 조의 현실과 현실이 섞은 허구를 담아낸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의 결말은 조가 프리드리히와 결혼하고 콩코드에 학교를 세워 행복한 삶을 사는 원작의 결말을 시각적으로 전혀 해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색온도와 연기, 편집 기법이 상반되는 몽타주를 충돌시켜 독립적이고 작가로서 강한 열망을 가진 조가 자신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결혼하는 결말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한다. 이야기 속 조는 결혼을 하고 고향에서 생활할지는 모르지만 실제 조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명확하지 않은 새로운 열린 결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정쩡하고 사랑스러운 인간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과 소품은 이상적인 정체성과 실제 정체성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이 장치들로  주인공들은 자신의 이상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타협하는 사회인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장한다는 것은 아직 그들이 미완성되고 미성숙한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편집을 통해 만들어지는 모호한 결말 역시 인물들의 정체성처럼 불완전하고 가능성이 열려있다.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정체성을 확립 과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생각보다 내가 평범하고 생각보다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하는 어정쩡하고 불완전한 사람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사회에 매몰되어 무기력하지 않고 발버둥 치는 (그러다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사람들을 감독은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타협하면서도 개인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보는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은 두 작품을 미장센을 통해 따뜻하게 담겨있다.










 






참고 문헌

홍수정, <레이디 버드>를 두 여자의 관점에서 보다, 씨네 21, 2018.04.2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9969

네이버 지식백과 영화 사전, ‘성장 영화’,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2617&docId=349465&categoryId=42617

장영엽, <레이디 버드> 사랑하고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소녀들에게, 씨네 21, 2018.04.02,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9777

곽한주, 방혜진, 윤성은, 한창호, 『영상의 이해 』, 동아방송예술대학 출판사, 2009, p.27~34


2020년 2학기 과제 수정


매거진의 이전글 우린 그에게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