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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율 Feb 22. 2021

우린 그에게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

영화 <퍼펙트 블루>(1998)

※ 많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있습니다.



미마를 바라보는 시선 

- 불분명한 의도, 그들을 비판하는가? 만족시키는 건가?


 미마가 성폭행을 당하는 씬을 촬영하는 장면은  촬영장 천장에 달린 화려한 미러볼과 미마가 성폭행을 당하는 연기 상황이 교차된다.  촬영 중에 단역들은 미마를 보며 열광한다. 미마가 과거를 회상하는듯 무대에 오른 아이돌 미마를 보며 열광하는 남성 관객들(아이돌 팬들)이 화면에 나타난다. 미마가 아이돌로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과 무대 위 스트리퍼 신분으로 강간당하는 인물에게 향하는 시선이 동일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 기존에 세계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돌'과 일본의 '아이돌'에 대한 문화와 인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2017)를 참고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같은 의미로 미마가 활동했던 아이돌 ‘챰’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출 때 터지는 팬들의 플래시 세례와 옷이 벗겨진 채로 미마의 몸을 찍은 사진작가의 카메라 세례가 오버랩되면서 팬의 카메라 세례가 마치 미마의 나체를 찍는 듯 쇼트의 순서가 뒤바뀌기도 한다.

  

 영화 속 아이돌과 미마를 바라보는 관객의 구성은 대부분 남성이다. 미마의 누드 화보를 소비하는 독자도 남성이다. 영화는 순결을 강조하고 여성을 숭배하면서도 계속해서 노출과 성적 학대를 요구하는 이중적인 사회를 고발한다.  선정적이고 음란한 시선과 여성을 숭배 대상으로 여기며 열광하는 시선 모두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임을 알리기도 한다. 미마의 수치심을 밝히고 물리적, 정신적 학대를 가하는 사회, 시선, 그리고 그 시선에 관객들도 동참하고 있음을 영화는 시사한다.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 미마. 미마는 관객들에게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보여질 것, 스펙타클, 관음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미마니아가 바라보는 미마의 모습이자 영화가 미마를 다루는 모습이기도 하다. 마치 미마를 떠받드는 듯 숭배하는 동시에 손 안에 들어가 인형처럼 미마를 취급하는 이중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저 메시지를 표현한다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불필요하게 선정적인 표현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마의 강간 촬영 장면은 촬영 장면일 뿐이라는 대사를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연기 중간에 컷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이 불쾌한 장면은 실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미마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촬영 장면에 돌입했을 때 보이는 강간 장면은 실제 강간 장면과 시각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관객들에게 허구적인 이미지를 보고 있는 상태라는 걸 인식시키려 하더라도 허구적인 장면이 그리고 있는 이미지가 폭력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라는 건 변함없다.

미마니아가 미마를 폭행하고 살해 협박을 하는 와중에 미마의 옷이 찢겨 진다. 관객들은 미마의 신체 노출을 적나라하게 또다시 관음 한다. 영화 초반 미마가 처음 자신의 집에 들어갈 때 관객이 그의 집에 들어와 둘러보듯 카메라가 작은 소품하나 남기지 않고 미마의 집을 샅샅이 훑는다. 피자 배달부가 사진 작가를 죽이면서 피가 튀기는 장면에서 사진 작가가 찍은 미마의 나체의 모습도 같이 오버랩 된다. 오버랩이 빨라질수록 여성의 나체가 부분적으로 보이며 파편화된 장면으로 변화한다. 미마가 사진작가를 죽이는 이유를 알려줌과 동시에 역동적인 살인의 현장과 여성의 신체를 함께 스펙터클로 사용한다.

 영화가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관음과 파편화된 나체의 화면을 선택하고 있다. 페티시즘(이성(異性)의 몸의 일부, 옷가지, 소지품 따위에서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 성욕의 하나- 표준국어대사전)을 자극하여 (남성의) 시각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게 일차적인 목표가 아닌가 의심을 갖게 한다.

  실제로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감독이 영화에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이유를 '환상을 투영하기에는 자신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이 가진 부정적인 면들을 알고 있어 여성이 캐릭터가 더 적합해서'라고 답한다.  또 다른 이유는 '현실적으로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여성 캐릭터가 받아들여지기 쉬운 사정이어서'였다.[1]  이 대답은 감독이 여성에게도 부정적인 면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배제했으며, 여성을 타자화된 시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드 로레티스가 말한 실제 여성에게 표상으로서의 여성을 대입해서 실제 여성을 바라보고 있음 또한 알 수 있다.) <퍼펙트 블루>속 여성은 지극히 개인화될 수 있다는 점으로 괴물 여성이 되어 남성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죄를 은폐하는데 활용된 것이다. 

(여성이 역사적으로 사회에서 배제되었다는 점을 이용해 곤 사토시 감독의 다음 작품, <천년 여우>에선 오히려 역사와 사회적 흐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흐름을 헤쳐나가는 발전된 여성 주인공을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차적인 관객의 대상을 남성으로 두고 있고 그들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만족시키면서 그들에게 문제점과 반성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까. 시각적 쾌락을 느낌과 동시에 그 시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관객은 생각할까. 영화가 이미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시각적 쾌락을 제공하고 있으면서 그 시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메시지가 설득력 있을까.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스펙터클만 즐기는 사람들에게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기 위하려는 목적인지 그들을 뒤에서 비웃으려는 의도인지 알 수 없다. 과연 비판 대상이 깨닫지 못하는 비판이 무슨 필요성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우린 그에게 동일시 되지 않는다.

 <퍼펙트 블루>는 여성을 주인공을 삼으며 벡델 테스트(앨리스 벡델이 만든 성평등 테스트. 조건: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자가 서로 대화를 해야 하며 대화 내용은 남자와 관련되지 않아야 한다.)에 통과한다. 비선형적이고, 완결도 높은 서사와 수준 높은 작화, 영상미, 음악 등 저패니메이션 영화 중에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 중 하나다. 그러나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캐릭터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만들어진 의도와 그들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아쉬움을 갖는다. 강력한 여성 괴물의 등장에도 결국 이 영화의 욕망의 주체는 ‘남성’임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영화의 메시지를 받아야 할 존재, 공포이든 시각적인 스펙터클이든 그 감정의 주인공은 남성이다.

 미마가 괴물화되어 보이는 착각과 강한 무법자가 되지 못한 루미는 애매한 괴물이 되어 공포적인 감정을 주며 영화 서사에 긴장감을 높이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영화는 일본 남성들의 폭력적인 시선을 비판하고자 했으나,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에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모순되는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퍼펙트 블루>는 기존의 애니메이션들이 가진 과장적인 특징이 배제된 채 실사와 흡사한 작화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실제 촬영을 해놓고 애니메이션화 해 놓은 것처럼 실사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실사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과연 <퍼펙트 블루>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사였다면 지금의 <퍼펙트 블루>와 같은 방식으로 연출이 가능했을까? 미마가 성폭행당하는 장면을 찍는 씬을 생각해보자. 실제 배우를 세워 그 장면을 촬영시켰다면, 영화에서 사용한 카메라 각도를 그대로 사용했다면 영화가 가진 폭력성이 관객들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올 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미마의 상황이 드라마 장면이라는 '가짜'이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진짜가 아니라 그림인 '가짜'이기 때문에 흐린 눈을 하고 영화가 표현하는 성적 학대와 잔인함, 폭력성을 넘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중세의 여성 나체화는 신학적인 목적으로 고차원적이고 초월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명분으로 콧대 높은 분들의 외설적 욕구를 충족했다. 폭력적인 사회를 냉소적으로 꼬집는다는 명분으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퍼펙트 블루>다. 그 속에서 숨쉬는 여성 캐릭터는 화면 밖에서 관음하는 감상자, 욕망의 주체들을 위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가 되어 영화를 풍성하게 메꾼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기분은 착각일까.





p.s 만약 나의 주체가 '나'라면 늘 창작자들이 의도한 주체가 따를 필요 없다. 내가 어떤 '우리' 안에 속할 것이며 어떤 '그'의 편에 설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참고 자료


 곤 사토시 감독 인터뷰.ウェブサイト・リニューアルのご挨拶, 2007年4月アメリカから『パプリカ』に関するインタビュー, 2002年12月オーストラリアから、主に「千年女優」に関するインタビュー, 2002年12月 カナダから、主に「千年女優」に関するインタビュー. kon’s tone, http://konstone.s-kon.net:80/


손희정, ‘경계를 탐구하는, 바바라 크리드’, 여성 이론, Vol.- No.25 [2011],2011,190-206(17쪽)


[1]“非常に現実的な側面では、アニメファンには若い女性キャラクターが受け入れられやすいという事情が大きく手伝っているのも事実です(笑) 私自身女性が大好きですしね。表現者の部分で真面目にお答えしますと、男性主人公を描くとなると私自身が男性なものですから、嫌な面やずるい面や弱い面や汚い面やスケベな面などが見えすぎてしまって、物語の担い手としてあまり相応しくない主人公になってしまいそうです。なので女性の方が幻想を投影しやすいのかもしれません。” -번역:“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애니메이션 팬에게는 젊은 여성 캐릭터가 받아들여지기 쉽다고 하는 사정이 크게 돕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웃음) 저 자신도 여자를 아주 좋아하고요. 표현자 부분에서 성실하게 대답하면 남자 주인공을 그리게 되면 제 자신이 남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싫은 면이나 교활한 면이나 지저분한 면이나 스케베한 면 등이 너무 드러나버려, 이야기의 담당자로서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주인공이 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환상을 투영하기 쉬운지도 모릅니다.”-2002年12月オーストラリアから、主に「千年女優」に関するインタビュー


2018년 2학기, 2019년 1학기  과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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