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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율 Apr 27. 2021

모든 것을 붕괴하는 '하녀'

영화 <하녀>(1960) - 김기영 감독


※이 글은 영화 스포일러와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결말이 어떻게 끝이 나는지 지켜보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이 모든 것은 실제가 아니라 남편(김진규 배우)의 소설이었음이 밝혀진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장면은 그다음이다. 남편은 프레임 밖에 있는 관객을 응시하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그러니까 신사들, 바람피우지 맙시다. 껄껄’과 같은 교훈을 건넨다. 갑자기 영화가 관객에게 딱밤 한 대를 쥐어박는 기분이었다. 만약 관객석에 여성이 있었다면 그들의 좌석은 뒤로 밀려나며 '이건 너희를 위한 영화가 아닌데 왜 여기 있어? 잘못 들어왔으니 보따리 싸서 나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어쩌나. 영화는 이미 다 끝났는데.

 프롤로그에 나온 까칠하고 할 말 다하던 부인(주증녀 배우)은 본격적인 서사가 흐르는 동안  순종적이고 가련한 태도를 유지한다. 결말부에 남편의 소설 원고를 보며 다시 까칠한 태도로 돌아온 부인과 그 뒤에 등장하는 하녀(이은심 배우)의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의문이 든다. 지금껏 본 모든 이야기는 한 남성 작가의 판타지에 불과한 걸까?



 그러나 또 한 번의 딱밤을 맞았다. 과연 감독은 남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길 바랐을까.

 하녀는 괴물화된 사회적 타자, 여성이자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약자다. 하녀가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건 쥐를 맨손으로 잡는다거나, 초반부 뱀처럼 혀를 날름댄다거나, 베란다에서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등 하녀의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대부분이다. 하녀가 남편에게 끝없이 집착하는 모습은 소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집착하고 분노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도시에 올라왔다. 가정부나 공장 노동자가 아닌 안정적인 중산계층으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을 대부분 짐작할 수 있다. 안정적인 가정을 얻고 더 이상 멸시를 받지 않아도 될 기회가 눈 앞에서 무너진다. 거기다 자기 자식은 죽이게 한 부인과 남편은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살 계획만 짜고 있다면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완벽한 가정에 집착하는 부부, 도가 지나칠 정도로 하녀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아들, 부인의 기계적인 노동, 여성노동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여성노동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어찌 보면 여성 노동자들보다 약해 보이는 남편 등 내용상 이상해 보이는 쪽은 하녀가 아니라 남편과 가정 쪽이다.

 하녀와 외도를 했음에도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괴로워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화를 내지도 않으며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겠다며 하녀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구상하는 아내. 진정으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건 부부의 행동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정말 두려운 건 전근대적 사고에 멈춰 겉과 속이 다른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그런 가정, 사회 질서를 해체하려 했던 인물이 하녀다. 영화 내내 능동적인 남성(남편)/ 수동적인 여성(아내)의 관계를 괴물화된 여성이 헤집고 다니며 기존의 사회적 틀이 어그러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도 가부장제에 박혀 있는 ‘아내’와 구분된다. 하녀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욕망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도 적극 보복을 가한다. 악해 보일지 몰라도 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녀 방과 부부의 (자식들도 함께 있는) 방 사이에 있는 계단에서 하녀가 죽음으로써 그가 결국 중산 계층으로 신분이 이동하는 것에 실패한다는 걸 보여준다. 쥐약을 먼저 먹은 남자 주인공은 하녀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남아 기어코 아내가 있는 방까지 들어가 할 말 다하고 죽는다. 남편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층민으로 몰락하지 않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한다.


‘기존의 질서를 위협, 붕괴, 해체’를 현재 시선으로 보면 새로운 시대를 열게 했다는 긍정적인 인식으로 볼 수 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현실에 위협을 가하는 실제의 공포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금천에서 일어난 식모가 집주인 아이를 살해한 사건을 모티브로 가지고 있고 그 당시 그런 일이 꽤 일어났다고 하니 현실과 상상을 결말 전까지 분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던 부인들이 ‘저 년 죽여라.’라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그리드가 말한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여성 캐릭터에 동일시’를 하지 못한 여성들이 존재했다. 그러나‘하녀’의 등장은 여성들이 수동적인 희생자라는 가부장제에 충분히 반박하는 캐릭터의 등장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감독은 ‘붕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붕괴하길 바랐다. 결말을 보고 긴장을 풀며 만족스럽게 나간 관객들의 마음 한쪽에는 붕괴의 조짐을 몰래 만들어 놨다고 느꼈다. 이 영화 전까지 여성의 적극적인 행동에 공포감을 느낀 남성이 몇이나 되었을까. 죽음을 맞이한 하녀와 결국 상상이었을 뿐이라는 결말로 한때 안정을 되찾았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하녀’가 나타날 것이라는 공포감은 계속 남아있었을 것이다.


 짓궂은 표정 남편의 마지막 모습은 감독이 전근대적 발상의 관객들 마음 한 켠에 의문과 불안을 심어 넣었음을 알리는 짓궂음일지 모르겠다.






















2019년 1학기 과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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