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마율 Apr 27. 2021

미장센은 강렬하게, 사회상은 냉철하게

<화녀> (1971) - 김기영 감독

영화 <화녀>
개요: 스릴러/ 한국 / 98분
감독 : 김기영
출연: 윤여정, 남궁원, 전계현 등
제작연도: 1971년 (국내 개봉 1971년)



※전작 <하녀>(1960)와 비교하고 있어 두 작품의 스포일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녀 리뷰 : 모든 것을 붕괴하는 '하녀' (brunch.co.kr))



사진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왜 <하녀>(1960)를 리메이크할까

 작품은 자식과 같다. 김기영 감독에게 <하녀>는 자신만의 작품이 무엇인지 “확신을 주는 자식”이었다. (유지형, 24년간의 대화, 대담, 2006) 든든한 자식을 계속 생산해서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당시 대중들에게 표현주의니 뭐니, 계단이 신분 상승과 추락을 상징한다는 둥 영화 미학적인 요소들이 눈에 들어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떤 독한 미친 식모 하나가 들어와서 한 가정을 풍비박산시킨다는 내용만으로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치를 떨게 했으니 말이다.

 비슷한 내용과 캐릭터, 같은 대사, 심지어 계단과 1층 바닥에 주인공들이 죽어있음을 알리는 <화녀>의 시작은 이전작인 <하녀>(1960)와 내용, 결말이 굉장히 흡사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를 채게 한다. 리메이크작은 원작 <하녀>와 무엇이 같고 다르며 왜 같고 다른지를 곱씹게 한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반복되면 관객들은 점차 사건에서 풍경으로 초점을 옮길 수 있다. 적어도 ‘도대체 저 미친년이 왜 저럴까’라는 의문을 가질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확장과 위축

 <화녀>는 <하녀>보다 확장되었다. 재봉틀에서 양계장으로 책임져야 할 살림살이와 경제권이 확장되면서 부인의 능동적인 활동이 두드러진다. 넓은 양계장을 홀로 관리하고 생물을 직접 갈아 동물성 먹이를 만드는 정숙(전계현 배우)은 더는 순종적이고 연약한 부인상으로 보기 어렵다. 시체를 갈아 만들었다고 추측되는 먹이를 먹은 닭이 낳은 생달걀을 톡 까먹는 정숙은 소름 끼치기도 하다.

 영화의 공간은 집안 내부에서 도시로 확장되었다. 강렬한 색채 조명에 집안의 기둥과 틀로 날카롭게 조각나 있는 프레임을 보여주는 집안 내부와 달리, 높은 건물들이 놓인 도시는 자연스러운 조명과 롱 숏으로 풍경을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서울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상징물이던 삼일빌딩과 사람들을 무심하게 화면에 담아낸다. “근대화가 일제를 청산한다.”는 당대 퍼져있던 가치관으로 본다면 삼일빌딩은 일제에 벗어나 산업사회에 들어선 대한민국과 강해진 국력을 대변하는 기쁨이었다. 삼일빌딩이 세워진 해에는 마포의 와우 아파트가 붕괴해 33명이 사망했다. 부실공사로 무너진 아파트는 삼일빌딩이 세워지는데 붙여진 ‘경제성장’, ‘도시의 근대화’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이에 비판하는 개인이 국가에 의해 추방되는 현실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대중들은 경제적 풍요 뒤에 숨겨진 비극을 알지 못한 채 표면적인 풍요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 

 직업소개소 소장은 직업여성의 약점을 잡고 돈을 뜯어내거나 정절을 요구한다. 소장은 명자(윤여정 배우)에게도 협박을 가한다. 그런 소장에게 겁먹기는커녕 “공갈은 무서워할 줄 알지만 그전의 내가 아니 “라는 명자는 깔깔대며 당장에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건물 옥상을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하늘 높이 오르는 빌딩같이 고도성장하는 도시에는 밝은 미래가 펼쳐진 듯하나, 그 도시에는 부서지고 있는 건물이 있고 부패하고 파괴적인 인간들을 배양하고 있었다.  

 형식주의적으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짓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에서 벗어난 리얼리즘적인 도시의 응시는 영화가 한 가정의 사건을 서술하지만, 영화의 목적과 메시지는 사회에 향해 있음을 알게 한다.

 

 여러 요소가 ‘확장’되었던 <화녀>에서 ‘위축’된 건 가부장적인 권력의 힘이다. <하녀>와 달리 부부의 아이들은 자신의 가정을 권력 삼아 하녀를 막 대하지 않는다. <하녀>의 남성 주인공은 겉으로 보기에는 점잖고 권위적이다. 반면 <화녀>의 남성 주인공 동식은 술을 먹고 상황에서 도피하거나 오히려 상황에 지배되기도 한다. 

 명자는 <하녀>의 가정부처럼 태생적으로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는 반항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부장제에 순종하는 시대에서 장려하는 여성상을 철저하게 따랐다. 시집을 보내준다는 조건을 세워 무급으로 노동착취를 당했고 집주인과 반강제적인 성관계를 한 것 역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이념에서 발생한다. 섹스를 목격하기만 해도 발작 증세를 일으키던 명자를 보면 그가 겪은 성폭행 트라우마가 얼마나 몸속 깊숙이 체화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명자의 폭력적이고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 단순한 원시적인 성적 욕망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며 남성의 사랑을 받고자 함도 아님을 시사한다. 

 식모는 본래 ‘미친년’이 아니었다. 식모의 광기는 만들어졌다. 그 광기를 만든 것은 가부장적이고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적인 사회임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한 남성 묘사와 명자의 트라우마는 명자가 악녀가 되어 부부 가정과 명자의 위치가 전복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감독은 우주, 전쟁, 도시 등 발전한 과학기술과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사진을 몽타주 하여 서사 사이에 배치함으로써 영화가 단순 치정 이야기가 아님을 계속해서 알린다.     


(몽타주: 영상 영화나 사진 편집 구성의 한 방법. 따로따로 촬영한 화면을 적절하게 떼어 붙여서 하나의 긴밀하고도 새로운 장면이나 내용으로 만드는 일. - 표준국어대사전)

사진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남과 여,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전복적 재현

 쥐와 닭은 생식능력이 뛰어다. 그리고 인간에게 혐오를 받는다. 영화는 사회에서 혐오받는 호스티스, 하녀(식모)와 쥐, 닭을 동일시한다. 영화 초반부에 동식(남궁원 배우)은 명자에게 냄새가 난다며 주변에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곧 동식이 술김에 명자를 범한 이후 괴물화된 명자는 동식과 그의 가정에서 지배적인 위치로 올라간다. 붉은 색채가 가득한 명자의 이미지는 명자의 살인과 함께 여전히 그를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만든다. 영화 후반부에 남성 주인과 식모가 함께 쥐약을 마시면서 두 사람 모두 쥐와 같은 존재가 된다. 명자가 괴물화된 여성으로 변하며 파괴되는 가정 내 계급에서는 혐오의 대상과 혐오하는 주체를 구분 짓지 못하게 한다. 

 <화녀>의 결말은 <하녀>처럼 남성 캐릭터가 관객을 응시하며 “신사 여러분, 그러니까 바람피우지 맙시다. 껄껄.”과 같은 대사를 던지지 않는다. 경찰서를 나선 정숙은 고가도로에 주저앉다 설상가상으로 배수로에 구두 한쪽이 빠져버린다. 정숙을 명자와 동식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하던 명자의 친구(호스티스)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정숙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명자의 친구는 정숙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부축해 도로를 함께 걷는다. 정숙과 명자의 친구가 걷는 고가도로에서 틸팅 숏으로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면 삼일빌딩이 작게 보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절뚝이는 중산층, 그를 부축하는 혐오받는 타자가 영화를 마무리를 짓는 인물이다. 상경하여 육체를 착취당하는 여성 노동자, 전근대적인 가부장제의 존속과 신분 상승의 욕망이 충돌하여 결국을 파멸해버린 가정을 다시 이끌어 가야 하는 중산층 여성은 환상이 아닌 현실에 있으며 관객도 이 어딘가에 속할 수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화녀>는 성폭행을 당해 괴로워하는 신체, 남성을 유혹하고 죽이는 신체, 가부장제의 존속과 해체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 안에 살아야 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체 등 시대상, 사회상을 여성의 몸을 빌려 말하고 있다. 이런 <화녀>의 여성 캐릭터 재현 방식은 남성의 육체(대부분 단단한 근육질)를 국가와 동일시하여 하나의 상징물로 치환함으로써 강인하고 기계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하드 바디”의 반대일 수 있다. 김기영 감독은 가부장제, 근대화, 도시화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폭로하고 깨부수기 위해 여성의 육체를 활용했다. 사회로부터 불완전하고 상처받은 신체끼리 부축하며 나아가야 하는 현실을 여성을 통해 보여주는 결말을 내놓는다. 이로써 <하녀>에서 관객을 남성 주체(참고 1)로 한정하는 것을 넘어 여성을 주체로 놓는 해석의 여지를 만들었다. 김기영 감독의 여성 캐릭터의 전복적인 재현 방식이 여성의 인권을 높이고자 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여성과 지방에서 올라와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타자가 아닌 우리 사회에 소속된 일원으로서 바라보고 있는 감독의 시선이 내재해있다.     


(참고 1:  영화는 관객을 개개인으로써 관객 audience 가 아니라 spectator의 정체성으로서 관객의 성격을 구축한다. 관객은 영화와 동일시되어 주체가 된다. 크리스타앙 메츠는 따르면 우리(관객)는 보고 있는 이미지가 다른 사람이 찍고 편집한 이미지임에도 직접적으로 이미지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1차적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2차적 동일시로 관객은 등장인물과 동일시가 이뤄지면서 영화 안에 있는 이야기와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김기영 감독만의 개성은 이야기에도 있다.

 김기영 감독의 작가주의는 강렬한 색채와 명암, 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그로테스크한 영상미학에 나타난다. 미학적 특성 외에도 영화로 전달하고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감독만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김기영 감독은 여성과 남성,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위치와 표현 방식을 전복하여 일상적이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시각적 충돌로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하녀>는 공포스러운 사건을 환상으로 마무리 짓고 액자식 구성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세웠다. 반면 <화녀>는 사건이 현실에서 벌어져 계속해서 비극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표현주의 영화에서 양식화된 ‘이건 모두 환상이었다.’는 결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김기영 감독만의 영화 미학을 만들면서도 관객에게 현실을 보기를 바라는 강한 메시지를 드러낸다.

 즉 강렬한 형식주의 영상 미학에 카메라가 포착하는 사실적인 도시를 보여주며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하는 캐릭터와 서사를 통해 감독은 경제적 풍요 뒤에 가려진 국가적인 착취(박정희 정부의 독재정치)와 갈등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서울에는 31층 빌딩(삼일빌딩)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죽기 좋겠다.”는 장난스러운 명자의 말에도 생각보다 묵직한 의미가 담겨있을지 모르겠다. 


사진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참고문헌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100선(영화학자 평론가가 뽑은 한국영화 대표작, 청춘의 십자로에서 피에타까지), 한국영상자료원, 2013

유지형, 24년간의 대화, 대담, 2006

김광현, “[공간의 역사]<12>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동아일보,2009.09.30., (2020/11.28 접속),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90930/8815664/1 

조성준, “박정희에 맞섰던 김중업, 김수근과 다른 길을 걸었던 건축가”, 매일경제, 2019.02.28., (2020/11.28 접속),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9/02/121617/



2020년 2학기 과제 수정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것을 붕괴하는 '하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