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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의무를 낳고 의무는 버거움을 낳다.

영화 <아무르>를 보고

by 하루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건 아프지 않고,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의 문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지만, 때로는 죽음보다 먼저 찾아오는 질병이 더 치명적인 적이 되기도 한다.

영화 <아무르>는 노후에 맞닥뜨릴 수 있는 질병과의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은퇴한 음악가 부부 조르주와 안느에게 불현듯 찾아온 질병은 노년의 평온하던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반신불수가 된 아내, 그리고 고령의 남편이 감당해야 하는 간병의 무게. 요양사도 불러보지만 존엄을 잃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안느는 남편의 보살핌만을 원한다. 그러나 돌봄은 사랑만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지친 조르주는 결국 비극적 결심을 내린다. 아내를 단정히 화장시키고 꽃을 곁에 두며, 마지막 사랑의 인사처럼 그녀를 죽음의 안식으로 이끈 것이다.


영화의 제목 아무르는 사랑을 뜻한다. 남편 조르주는 사랑 때문에 아내를 죽였다. 질병이란 침입자가 사라진 뒤, 다시 날아든 비둘기는 자유롭게 창문 밖으로 날아간다. 그 장면은 죽음이 남긴 평화를 상징한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의 7년


영화 속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 시댁 역시 시어머니의 치매로 힘든 시절이 있었다.

내가 시집왔을 때 어머님은 이미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셨다. 처음은 전주에서 7년을 둘째 형님이 모셨지만, 결국 손을 드셨고, 서울로 모시고와 형제들 합의로 네 며느리가 돌아가며 3개월씩 모시게 되었다. 나는 5살 아들과 함께 24평 아파트에서 어머님을 모셨다.


‘나는 잘 모셔야지.’ 처음엔 다짐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음식, 위생, 외출의 제약, 끝없는 간호는 내 일상을 무너뜨렸다. 남편은 늦게까지 일했고, 한 여름을 나는 어린 아들과 치매 걸린 어머님을 돌보며 3개월을 힘겹게 보냈지만, 어머님의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보행의 어려움, 청결을 위한 매일 목욕, 배변처리, 새벽의 배회…. 존엄이라는 말은 병 앞에서 무력했다.


나는 결국 요양사의 도움을 청했다. 하루 네 시간의 틈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그제야 둘째 형님의 고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의 효도에도 임계점이 있다는 것을.


7년의 시간이 흐른 뒤, 더 이상 집에서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형제들은 어머님을 요양원에 모셨다. 남편은 불효라며 괴로워했지만, 나는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솔직히, 내 삶을 지키고 싶었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간만큼은 어머님께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 삶과 죽음사이의 질병


요양원 시설에서 3년을 보내신 어머님을 결국 떠나보내며 우리 부부는 결심했다. 우리의 노후는 아들에게 짐 지우지 않겠다고. 공자의 시대에 만들어진 효의 개념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나는 내가 병들어 누우면 요양원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까지 가능하다고 떠드는 세상에서,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 있다. 알츠하이머와 치매는 개인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병들게 한다. 질병보다 삶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어머님을 통해 배웠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긴 질병일지 모른다.

언젠가 나에게도 질병의 고난이 닥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을까?

질병이 남긴 고민은 죽음이라는 더 깊은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나는 삶의 끝을 마음먹은 대로 천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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