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문학 하는 사람들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는 창비 같은 엔터테이먼트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엔터에 등단해야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잖아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긴 합니다. 이슬아 작가 같은 경우가 특이 케이스인데요. 이 사람은 기획부터 광고 프로듀싱까지 겸하는 예술가-엔터테이먼트의 성격을 갖추고 있어요. 국문과기도 하고 이런 거에 관심 있으실 거 같아서 발표를 준비해보았는데요. 예술가-비평가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보통 이런 사람들을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라고 하긴 하거든요. 이 중 하나인 히토 슈타이얼을 소개할까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고 갈게요.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로 볼꺼냐 탈로 볼꺼냐에 따른 논의들에 따라서 전개 성격도 바뀔 것 같은데, 사실 그 둘을 차이로만 볼 뿐입니다. 대표적인 사상가는 니체, 데리다, 들뢰즈 입니다. 이 사람들이 한 입을 모아서 얘기한 건, 예술가와 철학가의 관계예요.
전시 유형의 작품들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흔하게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예술은 오직 감각만을 말하는 매체여야 한다."
오히려 저는 우리가 사는 현 시대에서의 예술의 기능과 의의는
"예술은 우리라는 공간과 사회와 인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만약 오직 감각만을 말하는 예술의 경우, 오직 매체 속에서 말하는 경우는, 그것은 오직 매체 향휴자들에 의해 경유될 뿐입니다. 대중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예술' 작품들이 그러한 예시입니다.
제가 발표할 히토 슈타이얼이라는 작가는 우리가 겪고 있는 디지털과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작가입니다. 워낙 유명한 분이시기도 하고, 작품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에는 이 분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에 맞는 작업 방식을 갖추고 계십니다.
이 분의 직업은 '무빙 이미지 아티스트'라고 정의 되어 있습니다. 이 분은 심지어 책도 씁니다. '무빙 이미지'라는 정의도 이상하죠? 그냥 편하게 "영화, 혹은 시네마, 필름이라고 이름 붙이면 안되나?"
전시는 정말 다른데요. 무빙 이미지가 목적으로 하는 것과 영화가 목적으로 하는 것도 다릅니다. 제가 쓰는 표현으로는 전시는 원심력으로 작동하고, 영화는 구심력으로 작동한다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간단히 말해서 작품이 작품 외부를 향하고 있는가? 작품 내부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들은 작품 내부를 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의 예시도 있습니다. 사회를 말하는 시의적인 담론이 그런 예시인데요. 그렇다고 이청준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원심력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작품 내부를 바라 봄으로써 외부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기대하는 것이니까요.
반면에 원심력을 전제로 하는 작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들이 작품을 볼 때의 문제들이기도 한데요.
요즘 우리가 아는 전시회에 바나나 걸린 작품이나 뱅크시, 뒤샹, 워홀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아요. 전시에 걸린 바나나를 보고
"요즘 이딴게 예술이라니."
라고 하잖아요? 그게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겁니다. 뱅크시와 뒤샹 워홀도 맥락은 어찌 비슷하죠? 개인적으로는 뱅크시나 바나나는 급 낮은 예술가 까면서 정치적인 메시지로 승부보는 사람들이지 뒤샹과 워홀은 급이 다르긴 합니다. 대안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대중들을 설득시킬 건데?"
라는 물음에는
"그건 나는 모르겠고."
라는 답만 합니다. 자 그러면 히토 슈타이얼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하는지 보자고요.
이 사람은 이 사람의 에세이에서 세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어요. 포스트-재현, 포스트-진실,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세가지 측면.
제가 소개할 작품은 이 분이 말하는 '빈곤한 이미지'에 대해 소국화 해서 진행하겠습니다. 빈곤한 이미지란 데이터화 된 이미지들의 계급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이미지들의 계급은 쉽게 말해서 화질이 좋은가 화질이 안좋은가?에 대해서 논합니다. 해적화된 이미지들. 불법으로 공유되면서 화질저화된 이미지들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찍은 사진들은 '재현으로서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히토 슈타이얼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지 일반은 "재현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주체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물로서의 이미지", 나아가서 오늘날 주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중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차원이다.'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간략하게 말해서, 우리가 휴대폰 카메라로 찍는 사진들은 '우리가 핸드폰으로 사물을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이 사물을 통해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실을 창조한다. 그것들은 제2의 자연이다."
라고요. 뭐 글로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와 닿아야 하겠죠? 그래서 이 사람은 글을 쓰는 동시에 작품 활동을 합니다. 이것이 예술가-엔터테이먼트들이 하는 거예요. 철학을 하는 동시에 예술을 하는거죠. 워홀도 그렇습니다. 뒤샹은 좀 다른데, 이 사람은 레디메이드라고, 쉽게 말해 공산품을 예술로 보자하는 측면에서 모더니즘입니다. 피카소 끌레 몬드리안 이런 사람들도 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데, 오직 미술과 전시 매체에서의 새로움입니다.
2.
<신체 강탈자> -히토 슈타이얼의 논의에서
1. 앤디워홀의 마우쩌둥 시리즈
2. 차은우와 빈곤한 이미지
3. 인스타그램과 AI보정
1. 앤디워홀의 마우쩌둥 시리즈
워홀이 말하고자 했던 건,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인 것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중국의 마우쩌둥과 미국의 마우쩌둥은 어떻게 다른지요.
2. 우리는 애초에 진실 따위를 원한 적이 없다.
만약 저와 친구가 같이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는다고 가정해봅시다. 기본 카메라로 셀카를 찍는다는 것을 저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에게 실례거든요. 여성분이라면 더더욱이요. 이게 우리가 사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찍는 이미지들은 '재현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진을 본다기 보다는 사진이 우리를 본다는 게 적합할 것 같아요. 이게 슈타이얼이 말하는 '포스트-진실'이라는 건데요.
"이미지가 액정과 전기로 만들어지고 우리의 소원과 공포로 얻는 물신, 즉 그 자체적 존재 조건의 완벽한 화신이라면?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파편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이다. 당신이나 나 같은 사물이다."
우리가 원본과 복사본, 무엇이 실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를 불안정한 시대라고 봤잖아요? 저는 요즘 친구들의 사진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얘는 사진 찍을 때마다 변장하는 외계인일 수도 있겠다."
플라톤이라면 이러한 복사물들은 이데아를 흉내내며 현실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나쁜 것들이라고 표현하겠지요. 이것이 우리가 보통가진 생각입니다. 현실과 가짜가 구분이 안가는 세상. 하지만 저는 제 친구가 예쁜 사람이 되는 걸 긍정합니다. 보정은 좋은 거예요.
슈타이얼의 표현이라면
"사물은 더 이상 수동적이고 고루하며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현실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라는 이론을 가져야 되요. 보정도 유행을 탑니다. 언제는 아이유처럼, 언제는 뉴진스 민지처럼, 언제는 카리나처럼, 언제는 장원영처럼요.
저는 외계인, 바디 스내쳐, 신체 강탈자라고 표현합니다. 보드리야르라는 사회학자는 '시뮬라시옹'이라고 표현합니다. 들뢰즈라는 사람은 이데아 같은건 존재하지 않고 모든건 시뮬라르크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좀 더 사유를 나아가 봅시다. 이미지에 대한 관념도 변화합니다. 사진을 예시로 들어볼께요.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는 '재현으로서의 이미지'잖아요? 우리가 대상을 포착하고 우리가 찍었으니까요. 슈타이얼은 핸드폰 카메라로 찍는 사진들을 예외로 합니다. "그 핸드폰이 우리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 보정 어플로 예시를 들어볼께요.
만약 우리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올리는 사진에서 보정을 통하거나 감성을 통한다면, 진짜와 가짜에 대해서 새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은 유희적인 작업입니다. 세상에 혼돈은 오지 않아요. 혼돈이 오는 것은 자신이 텍스트적 세계와 가까울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