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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uff Aug 28. 2024

역사 드라마의 형식에 관한 사유

토론 동아리 주제 글, 두개의 주장

1. <역사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 안에서 경유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여러 가짜들 속에서 경유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시작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진실들 속에서 경유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한국의 땅에서 일어나는 병들이란 인스타, 유튜브 같은 대체 현실 속에서 유래된다. '나는 이렇게 멋지게 산다.' 라는 인플루언서들의 자본주의의 상품들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란 따분하고 비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이 연출됐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했다고 해도 바뀌는 것이 있을까? 


첫번째로, 우리는 보여진다는 것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우리 머리에 박힌 이미지들은 사물이 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이미지는 분위기고 감정이다. 캠페인 정치 속에서, 우리를 갖고 편향되게 작용하려는 것은 감정이다. 영화 <조커>가 우리에게 심어준 것은 "이 사람은 살인을 했다."라는 텍스트의 범주에서 벗어났다. 


두번째로, 미디어 매체는 가짜를 현실처럼 작용하게 한다. 네스호의 네시와 UFO 같은 가지각색의 가짜들은 우리가 믿고싶은 존재이다. 우리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들이다. 문제는 우리의 생활 양식이 전세계적 유행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다. 중국의 드라마에서 '파오차이'가 반찬으로 사용되는 것이 유행된다고 생각해보자. 유행을 따라 파오차이를 반찬으로 먹고 싶다고 투정부리는 중국 본토의 아이들의 유행은 문제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문화를 대하는 사소한 시선이다. 


우리가 '한국의 것'을 상품화하고 표현한 노력들, 태국과 인도가 보는 한국은 우리가 마주한 시선과는 다를 것이다. 이것이 인플루언서들이 자신을 꾸미는 수법이자, 우리가 역사 드라마를 마주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시선이다. 이러한 대체현실은 워홀이 표현한 '마릴린 먼로'와 '마우쩌둥'이다. 워홀의 표현으로는 "속이 빈". 


공산주의자들이 보는 마우쩌둥과 워홀의 '마우쩌둥 초상화'는 맥락을 달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는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 역시 과거의 시대적 관념이나 시대적 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고민은 오직 "이것을 어떻게 보기 좋고, 미학적으로 바꿀까?"라는 속이 빈 시각이며, 우리가 경험할 시대 속의 관념과 분위기는 제외되어 있다.

로맨스 역사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현되었다고 생각하는 감성과 분위기는 예술 매체가 역사적 사실에 귀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시각 덕분에, 우리를 감상에 젖어들게 하는 동시에 시대적 관념과 시대적 시선이 제거되고 정치, 그리고 편향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한다.  



2. <예술 매체는 역사적 사실 밖에서도 활동한다.>

형식- 철학적 구성


예술이 현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것을 재현적 양식으로 보느냐, 아니면 슈타이얼의 표현으로 "너와 나 같은 사물이다."라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술을 현실에 귀속된 사실 안에서 작용해야 된다는 '재현적 양식'의 주장은 사물을 보는 위치 관계가 명확해 보인다.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재현적 양식이란 지시체가 이미지 외부에 미리 존재하고 카메라를 비롯한 광학적 장치들이 그 지시체와의 지표적 연결을 보증한다는 가정들을 전제한다. 이들의 주장인 '재현된 이미지'는 '우리가 대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투명한 재현에 대한 신념이 가정된, 이미지를 보는 '재현적 양식'은 디지털 시대를 마주하며 국면을 달리하게 된다. 여기서 슈타이얼의 주장을 꺼내보자. 슈타이얼이 말하는 '포스트-재현'이라는 정의는 '우리가 대상에 대해 안다는 생각하는 것'의 반대인, '대상이 우리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지 일반은 "재현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늘날의 주체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물로서의 이미지", 나아가 오늘날 주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중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차원이다. 이때의 이미지-사물이란 재현적 체제에서처럼 주체와 분리된 객체로서의 이미지를 넘어선다. 

이미지가 물리적 현실에 다양한 모습으로 중첩되고 변모되면서 영향을 미치는 한, 이미지는 주체의 감각을 구성하는, 그 자체적 존재로서 물신화된다. 이미지가 물신적인 존재라는 의견은 디지털 매체의 역사적 기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현실 세계의 파편'이다. 


'재현적 양식'의 이미지가 '진실로서의 이미지'로 말하게 되어 우리에게 '보정된 사물'만이 허구로 작용했다면, '보정된 사물'이나 '보정되지 않은 사물'이나 같은 존재, '객체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주체로서의 이미지'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취급하는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을 허구로 망가뜨리는 드라마'의 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담론을 예술 매체에 끌어들이는 것은 오히려 진실과 허구를 추리게 하여 예술의 정치적인 기능을 강화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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