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히 여기기, 한 줌의 시간을

by 시시수수


베를린 교외의 작은 도미토리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중국에서 온 동갑내기 유롱, 같은 학교에서 온 동생 그리고 나 셋이서 각자의 취향을 접시에 담았다. 우린 베를린 자유대에서 진행하는 써머스쿨에 등록해 이 곳에 왔다. 이 친구들은 우연히 같은 층에 배정되어 알게 되었다. 중국인 친구는 브로콜리와 청경채를 푹 익혔고 웰빙식으로, 한국인 동생은 자취력이 돋보이는 먹음직한 파스타를 만들었다. 그에 비해 초보자취생인 난 마트에서 사온 독일표 소시지를 무식하게 태워냈다. 음식과 맥주 한 캔을 매개로 더 가까워진 우린 이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마침 유롱이 다운로드 받은 영화가 몇 개 있었고 그 중 한 영화를 추천해주었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인기있는 영화였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마친 후 우리는 한 쪽면에 두루 앉아 영화를 시청했다. 자막없이 직청직해 해야하는 이슈로 내용을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좀처럼 보지 못했던 영화 구성과 멀티버스의 시각적 장치는 굳이 언어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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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23년도의 7월 어느 하루 였으니 그 이후로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익숙한 얼굴의 포스터가 내게 추천하는 콘텐츠 중 하나로 제안되었다. 포스터를 빤히 바라보며 과연 이것을 내가 봤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겨 방을 밝게 비추던 조명의 밝기를 최소로 남긴 후 영화를 플레이했다.

한글 자막을 통해 얼추 갸늠할 뿐이었던 내용을 재교정하며 관람했다. 이게 이런 뜻이었어? 하며 에블린의 가족 서사를 쫓다가, 검은 에브리띵 베이글을 앞에서 엄마와 딸이 전투하는 장면에서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보인 반응은 당혹스러웠다. 멀티버스 세계관을 통해 소세지로 된 손으로 살아가는 세계, 엄지 근육을 기르는 무도인의 세계 등 B급 감성의 유머가 종종 달아오르는 긴장을 완화시키며 감정적 울림을 느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삶, 저런 삶, 유희 속의 절망, 유머 속의 감동 등 모순을 포함한 복합적인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후반부의 감정선은 더 부대끼고 두터워졌다. 마치 블랙홀 같은 에브리씽 베이글의 거센 흡입력으로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다.


영화는 크게 두 축이 맞서고 있다. "인생은 어차피 의미없는 것이야." 노력해봤자 결국 제자리로 돌아갈뿐이라는 허무주의의 입장과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우선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오히려 삶을 소중하게 여겨 의미를 느끼자는 실존주의의 입장이다.


조이가 느낀 외로움과 좌절은 끝내 '조부 투파키'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건 마냥 영화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현대사회가 거울처럼 비춰졌다. 물질만능주의, 정서적 결핍, 다름을 이해받지 못하는 상처가 잘 짜여진 SNS 무대와 대비되며 곪아버린다. 조부 투파키로 모든 삶을 살아본 조이는 아무것이나 될 수 있으나 어떤것도 될 수 없는 검은 홀(허무주의)에 빠진다. 삶이 부질없다는 느낌은 어느 마음의 응어리를 짊어지고 있는 한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조이는 에블린이 자신과 함께 블랙홀 같은 베이글로 빨려 들어가길 원한다. 에블린은 자신만의 죄책감과 외로움 속에서 그대로 조이를 따라가지만 그 순간 남편이 등장한다. 그가 가진 다정함은 에블린이 망쳐버린 파티와 사업과 가정을 회복하며 부인에게 ‘다른 길’을 말해준다. 제 3의 눈을 뜬 에블린은 다시 조이에게 다가간다. 적 앞에 가드를 내리고, 벼랑 끝에 자신의 몸을 던지며. 영화는 다정함을 담은 연대를 보여준다. 조이의 대사처럼 조부 투파키도 결국 나와 같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단 한명의 사람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한 가지 더 인상적인 지점은 현생에서 에블린이 만난 사람들은 이생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위치와 역할은 달라졌지만 지금껏 알게된 사람들은 결국 다른 생에서도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의 관계를 새로 인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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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려고 들 때 영화가 다룬 삶의 부질없음을 조용히 떠올린다. 허무한 삶에 그런 평가들이 중요하기나 한걸까? 내가 타인의 삶을 평가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뭐라고? 삶을 평가할 수 있는건 오직 자신이다. 자기만이 그 기준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세운 기준들은 자신이 옳다는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에블린의 결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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