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속에서 살았다.
수면안대는 필수였고, 새벽 4시에 겨우 잠들어 아침 10시쯤에 캡슐 커피 머신 소리에 잠을 깼다.
푸슈우우-.
커피 한 잔, 빵 조각으로 브러치를 때우고, 씻고 외출 준비를 한다.
오후 2시부터 방문 과외 강사로 일하고, 오피스텔 원룸으로 귀가하면 밤 11시.
그때부터 나의 여가를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심야영화를 보기도 하고,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패스트푸드 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
십여 년 동안 내가 살아온 ‘도시 노처녀’의 일과였다.
일하는 시간 탓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도시는 자정 이전에 잠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 자정 넘어 심야에 이루어졌다.
제주에 내려와 시내에 살 때까지만 해도 이 습관은 건재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제주 시내를 벗어나 놀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8시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촌락은 ‘저녁’이라는 말보다 ‘밤’이 더 어울렸다.
불빛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서 제주는 자식을 많이 낳나 봐.”
함께 있던 육지 입도민이 한 말이었다.
촌에서는 할 게 없으니 자고, 자다 보니 생기더라나.
실제로 제주는 다자녀 가정이 많았다.
도시에서 일할 때 세 자녀 가정은 특별한 케이스였는데, 제주에서는 한 자녀 가정이 희귀했다.
세 자녀는 기본, 네 자녀는 흔하고, 요새 세상에 다섯 자녀도 있었다.
엄마가 마흔 넘어 낳았다는 넷째 막둥이들도 자주 만났고, 재혼 가정이 많아 이복형제들과 함께 사는 집도 많았다.
함덕에서 신혼을 시작하고도 일 년 가까이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지 못했다.
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자정 전에 누워도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들었다. 간혹 알코올 섭취로 일찍 잠들면 새벽 두세 시엔 깨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머리만 대면 자는 스타일이고, 나는 졸려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여덟 시간을 자야 피로가 풀린다 했고, 나는 자는 시간이 아까워 여섯 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하루 일곱 여덟 잔씩 물처럼 마시던 커피를 완전히 끊게 된 계기가 있었다. 시험관 아기를 준비하면 서였다. 커피를 끊자 깊이 잠들어 중간에 깨는 일 없이 아침까지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손톱밑 흙 묻히고 햇볕에 얼굴이 그을리면서부터는 밤 열 시 전후로 졸음이 쏟아졌다.
첫해에는 검질을 배웠다. 잡초라고 그냥 뽑는 게 아니었다.
토톡토톡-.
밑동을 잡고 살살 흔들면 잔뿌리가 땅을 헤집는 소리가 손끝까지 전해진다.
그 진동이 느껴질 때, 비로소 제대로 뽑힌다. 뽑혀 올라올 때의 쾌감, 검질의 손맛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1년 차 시절의 나는 그저 '방관자'였다.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나서는 자연에게 일체를 위임했다.
결과는? 밭의 절반은 검질이 점령하고 나머지 절반은 벌레가 나눠 먹었다.
유기농 무농약이어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게으름이었다. 뻔뻔하게도 나는 그것을 '자연주의 농법'이라 불렀다.
2년 차가 되자 자신감이 자랐다.
마침 어디선가 날아든 호박씨가 싹을 틔웠고, 한쪽에 고구마 모종을 심었다.
‘자연아, 자라라!’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준 걸까?
텃밭은 순식간에 호박 넝쿨과 고구마 넝쿨이 뒤엉킨 아마존 정글로 변했다.
처음엔 풍년이라며 여기저기 인심을 썼지만, 끝도 없이 뻗어 나가는 넝쿨의 기세에 질려버렸다.
풍년의 기쁨이 ‘징글’함으로 바뀌는 건 한 끗 차이였다.
드디어 3년 차. 이제는 모종들을 나란히 줄 세워 심는 여유까지 생겼다.
하지만 농사의 끝판왕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벌레’였다. 모종을 심는 족족 깡그리 먹어치우는 얌체 같은 벌레들을 보며 부들부들 떨다가도,
잘 자라서 꽃이 피고 나비와 벌이 날아들면 어느새 내 마음은 수확철에 가 있었다.
그렇게 계절을 몇 번 넘기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져 있었다.
“조들지 마라, 와리지 마라.”
(조급해하지 말고, 허둥대지 말라.)
남편과 시어머니께 자주 듣던 소리도 줄어들었다.
식물도감으로 익혀 유식 한 척하던 도시 노처녀가 시집와서 촌아낙이 되었다.
촌에서는 검질이 시가 되고, 넝쿨이 이야기가 되고, 벌레마저도 내 인생의 한 챕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