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리 Jun 06. 2023

반액 와규 스테이크의 행복론: 일본친구와의 대화

부킹 해피니스

큰아이가 유치원생일 때 만났던 마마토모(엄마친구)들 중에 지금도 꾸준히 만나서 식사를 함께 하고 대화를 나누는 몇 사람이 있는데 그중 한 엄마와의 식사자리.


일단 그녀는 아이가 무려 넷이나 되는데, 넷째 아이가 돌이 될 무렵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해 지금은 2년째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

그녀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나이 차이가 꽤 있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결혼 이후 육아와 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넷째 출산 후에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고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의학의 힘을 빌리게 되었다. 그녀가 약을 장기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은 많지 않은데 서너 달에 한 번씩 만날 때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우울증보다는 조증에 가까울 정도로 밝고 즐겁기만 하다. 이날은 그녀가 가고 싶다던 카페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대화는 시종 유쾌했는데 대화 중에 그녀는 이런 말들을 했다.


지금까지 애 넷을 치다꺼리하는 게 너무 벅차서 거울을 볼 여유도,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고. 그런데 아이를 기관에 보내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아직 미취학 연령인 셋째와 넷째도 어린이집 종일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앞으로는 이 남자와 어떻게 살고 싶은지, 40대, 50대, 60대는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오 그래? 어떤 생각을 했어?"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음.. 마트에 갔는데 아주 맛있는 와규 스테이크에 반액 할인 씰이 붙어있는 거야.

또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아직 신선해 보이는 초밥에 할인 씰이 붙어있는 거야.

그런 걸 발견했을 때 나는 행복해!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나는 진심으로 그만 뿜어버렸다. 큰 소리로 웃는 나를 보고 그녀도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왜? 왜 그렇게 웃는 거야? "

"아니, 정말 너무 생각지 못한 대답이라서.

그럼 하나 물어볼게. 그렇다면 그건 지금의 네 생활과 뭐가 다른 거야? "

"다른 거? 음.... 아무것도 없지! "

우리는 마주 보고 또 함께 빵 터졌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일본에 살면서 이런 가치관들을 나는 꽤 많이 만난다.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잘 나오지 않는 대답이지 않은가. 한국인들은 대부분 꿈이 크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라왔다.

큰 욕심보다는 일상의 소소함을 누리는 마인드.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기쁨들과 오늘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하는 마음들이 내가 만난 많은 일본인들에게는 배어있다.

사실 남편이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의 이런 부분은 연애할 때는 매우 존경스러운 부분이었고, 세끼를 함께 먹고 한통에 빨래를 돌리는 결혼이란 것을 하고 난 후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하나이기도 하다. lol


“그럼 너는? 너는 어떻게 살고 싶은데? "

라고 묻는 그녀에게 나도 조금 생각해 본 후에 대답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라는 화두를 ‘꿈’ 혹은 ‘이상’이라고 한다면

 나한테 이상은 언제나 높은 나무 위에 걸린 종이비행기 같은? 뭐 그런 거였어.

가질 수 있지만,  가지고 나면 또 한 번 저 멀리 던져보고 싶어지는 거.

그래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실 단 한 번도 내 인생을 지금 이대로 퍼펙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



돌아보면 그 종이비행기 같은 꿈들은 분명 내 삶의 괴로움이었지만, 그대로 원동력이기도 했다.  

사실 어릴 때 꿈꾸며 소망했던 것들 중 일부는 현재의 내 모습 그대로가 되어 있고,

또 일부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또 일부는 여전히 저 높은 곳에 걸려있다.

모순되지만 그렇다. 인생이란 결코 퍼펙트할 수 없다. 퍼펙트하지 않은 그 자체를 퍼펙트함으로 겸허히 받아들이며 살아갈 뿐이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나는 모처럼 일찍 퇴근한다는 남편의 퇴근길을 운동이라도 할 겸 산책 삼아 마중 나갔고, 함께 걸으며 그녀와의 ‘반액 스테이크론’을 남편에게 공유했다. 돌아온 남편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 친구 마음 잘 알 것 같아. 여러 개의 작은 행복을 발견하는 게 인생 전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아. “


음… 행복의 크기보다 행복의 빈도라는 말이지.


남편과 어설픈 행복론을 공유하고 있자니, 작년 교사 연수 때 들었던 아주대 김경일 교수님의 강의 중 기억에 남는 단어가 떠올랐다. ‘부킹 해피니스’


행복에도 장부에 기록되는 Booking Price가 있다는 뜻!

예를 들면 우리가 설날에 어른들께 세뱃돈을 받는데 충분히 유복하신 친척 어른이 만약 꼴랑 천 원을 주셨다고 하자. 감사하기는커녕 화가 날 수도 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지금 장난하세요?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 세뱃돈’을 받은 것으로 나의 마음이 ‘쳐 주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5만 원은 주셔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내 마음속에  ‘받은 걸로 쳐 줄 수 있는’ 세뱃돈의 부킹 프라이스는 5만 원이다.


행복에도 그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내 마음의 장부에 행복으로서 인식되는 크기의 행복이 있고, 그 크기를 만족시키는 행복감의 빈도가 많아질 때 사람은 인생 전체를 행복하게 느낀다고 한다. 부킹 해피니스론!



그녀와의 반액 스테이크 논쟁과 김경일 교수님의 부킹 해피니스론은 요 며칠 내 마음속에 깻잎논쟁만큼 강하게 남아 있다.


가족들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이나 와인을 함께 나누면서 느끼는 작은 행복감들이 인생의 지루한 어떤 순간들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 , 날씨 좋은 어느 날 깨끗하게 청소된 집에서 웃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행복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것들이 만약 30점짜리 행복이라면 나뭇가지에 걸려서 도무지 닿지 않을 것 같은 종이비행기를 손에 넣었던 짜릿하고 경이로운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100점짜리 행복이라고 할까?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그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행복이 기말고사 시험지와 다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100점짜리 한 장 보다 30점짜리 세장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지도!





#행복론 #부킹해피니스 #김경일교수 #한일부부 #한일커플 #국제연애 #행복의크기 #행복의빈도 #일본 #일본생활 #일본일상 #마마토모 #일본남자 #국제결혼 #행복







매거진의 이전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살해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