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니템은 굉장해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나랑 Y는 필요 없지만 갖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 물건을 ‘기부니템’이라고 부르는데, 기계식 키보드도 여지없이 기부니템에 속했다(기분템 아니다. 기부니템이다). 내겐 이미 거금 10만 원도 넘게 주고 산 매직 키보드가 있었으니까. 때문에 키보드를 사기 전에 고민을 오래 했다. ‘내가 이걸 사도 되는 거 맞나? 난 이미 개쩌는 매직 키보드가 있는데.’ 고민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수십만 원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십만 원 정도인데 괜찮지 않나?’
고민은 길었지만 앞서 밝혔다시피 결국에는 샀다. 여기에는 Y의 부추김이 한몫했다.
“사고 싶으면 사. 너 너한테 돈 별로 안 쓰잖아.”
그건 그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Y의 말대로 나는 나를 위한 소비를 적게 하는 편이다. 미니멀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갖고 싶은 게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돈을 쓸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는 것도 이유다. 남의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죄책감을 느낀다니. 아마 걱정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걱정이 많을수록 소심해지는 법이니. 그렇게 미룬 게 어디 한두 개일까. 여행도 미루고 취미도 미루고. 심지어는 잃어버린 커플링을 다시 맞추는 것도 미뤘다. 적다 보니 조금 속상하네. 왜 좋은 일은 항상 나중을 기약해야 하는지.
그렇게 해서 산 키보드는 썩 만족스러웠다. 매직 키보드에 비해 높이가 높다는 것과 한글 각인이 안 되어 있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나는 얼마 써 보지도 않고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딸깍, 딸깍 하는 소리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매직 키보드를 팔고 새로운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 더 사고 싶을 정도였다. 머릿속에서 Y의 놀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역시 넌 패션 환경 운동가였어.’
패션 환경 운동가라. 그건 Y가 나에 관해 쓴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했다. 나를 보면 ‘환경을 위하는 나 자신’에 취해 있는 것 같다나 뭐라나. 행동보단 주둥이가 앞서 나가는 편이긴 해도 환경 운동을 패션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데… 조금 억울한 기분이다.
여기까지, 쓸 말도 없는데 억지로 써 봤다. 새로 산 키보드를 마구마구 써 보고 싶어서. 마구마구 쓰고 나니 기분이 좋다. 역시 기부니템이야. 한동안은 글을 열심히 쓸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