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쇼핑백을 보는 순간, 저는 한숨부터 쉬었습니다.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아내 손에 명품 브랜드 쇼핑백이 들려 있었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한숨을 쉬었습니다. '또 돈 썼구나.' 그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을 겁니다.
"오늘 친구랑 백화점에 쇼핑갔다가 가방 하나 샀지..."
아내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습니다. 25년 결혼 생활 동안 늘 그랬듯이.
"얼마 주고?"
"....안비싸....100만원쯤......"
그 순간 제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미쳤냐는 말은 삼켰지만, 제 시선만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가방 하나에 100만원이라니. 돈 관념이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아내가 돌연 현관 신발장을 가리켰습니다.
"당신 등산화만 세 켤레잖아. 한 켤레에 20만원씩이면 60만원이지."
그리고 옷장을 활짝 열었습니다. 제 등산복이 주르륵 나왔습니다. 여름용, 겨울용, 사계절용. 고어텍스 재킷 두 벌, 등산 배낭, 스틱, 헤드랜턴까지.
"다 합치면 249만원이나 하네."
아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실 구석을 가리켰습니다. 중고로 샀다며 자랑하던 제 타이틀리스트 골프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골프채 세트 150만 원, 드라이버 60만 원, 골프화 18만 원. 스크린 골프장 월 6만 원씩 2년이면 144만 원. 골프만 372만 원이나 쓰셨네요. 하~."
계산기를 꺼낸 건 아내가 아니라, 25년간 쌓인 불평등이었습니다.
"3년간 당신은 621만 원 쓰셨고. 나는 화장품, 미용실, 옷값 다 합쳐서 234만 원이에요. 거의 세 배 차이라구."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런데 왜 내 가방 하나만 문제라고 하는데? 당신 등산화는 건강이고, 중고 골프채는 알뜰 소비고, 내 가방만 사치인거야?"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니...등산은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야. 안 가면 관계가 끊기고..."
"그럼 내 가방은?"
아내가 제 말을 끊었습니다.
"나는 친구들 만날 때도 낡은 가방 들고 다녔어. 명절 때 시댁 가서도 10년 넘은 핸드백 매고 갔고.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가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그제야 아내가 쏟아낸 말들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2년을 모았다는 이야기. 한 달에 5만 원씩, 점심 한 끼 줄이고 커피 한 잔 참으면서 모았다는 것. 친정 어머니 병원비 낼 때는 모아둔 돈 다 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는 것.
"친구들 만나자는 연락 와도 핑계 대고, 미용실도 3개월에 한 번으로 줄였어. 화장품은 마트 브랜드로 바꿨고, 옷은 단 한 벌도 안 샀어. 그렇게 2년을 모았던 거라고."
저는 그날 밤, 25년 결혼 생활을 처음으로 돌아봤습니다.
결혼 초, 맞벌이 시절부터 아내 월급은 생활비로 다 나갔습니다. 식비, 공과금, 아이들 학원비까지. 제 월급은? 용돈 50만 원 제외하고 전부 저축했습니다.
"내 용돈은 네 월급에서 알아서 써."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했던 그 말이, 아내에겐 25년간의 불평등이었던 겁니다.
아내가 생활비 더 달라고 했을 때, 저는 가계부를 요구했습니다. "어디에 새는 거 아니야?" 의심의 눈초리로요. 제가 등산화 세 켤레 사고, 골프채 바꿀 때는 누구한테도 보고하지 않았으면서요.
다음날, 저는 제 통장과 아내통장을 같이 보자고 했어요. 아내 통장에는 50만 원도 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
아내의 질문에 저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번 돈이니까 당연히 많지. 나중에 노후 자금으로 쓸 거야."
"그럼 내 노후는? 내가 번 돈은 다 생활비로 썼는데, 내 노후 자금은 어디 있는거냐고?"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25년간 단 한 번도 우리는 평등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내가 제안했습니다. 각자 용돈을 똑같이 나누고, 개인 소비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자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불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왜 갑자기 바꿔?'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습니다. 제가 골프용품을 사면 아내 눈치를 봤고, 아내가 미용실 가면 제가 눈치를 줬습니다. "벌써 미용실 가?" 하는 표정으로요.
하지만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남편도 저도 각자 돈을 쓰는데 익숙해졌습니다. 제가 등산화를 사도 아내가 뭐라고 안 했고, 아내가 화장품을 사도 제가 뭐라고 안 했습니다.
"요즘 엄마 표정이 밝아졌어. 무슨 일 있어요?"
"엄마가 돈좀 생겼어."
딸이 웃으며 물었다고 합니다. "복권 당첨됐어요?"
"아니, 엄마 용돈이 생긴 거야."
25년 결혼 생활 동안, 아내에게 제대로 된 용돈이 없었다는 걸 저는 몰랐습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 등산화는 건강이고, 제 골프는 인맥 관리고, 아내의 가방은 사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100만 원짜리 가방 하나가 25년 결혼 생활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가방은 단순한 명품이 아니었습니다. 25년간 참아왔던 불평등에 대한 아내의 첫 번째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뒤늦게나마 진짜 평등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거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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