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정필 Jan 27. 2023

그들만의 축제 교육인의 밤

 “딩동” 알람 메시지가 나를 깨운다. 거실 창으로 비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한쪽 실눈을 뜨며 휴대폰을 열어본다. “교육인의 밤 & 졸업식” 알림이다. 언제부터 인가 3일을 넘기지 못하는 내 기억력이 미덥지 못해  휴대폰 일정관리를 시작했다. 첨단기기의 구속감은 있지만, 내 기억을 보충해 주는 이 정직한 녀석의 친절함에 하루하루 의지하는 횟수는 늘어 간다. 알람 메시지 덕에 설레는 아침이다. 처음 가보는 “교육인의 밤 & 졸업식”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자주 있지 않는 저녁 외출에 내 즐거움을 한 스푼을 보탠다.  

 햇살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자 나는 카레를 꺼내 이른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 이면  혼자 하는 외출의 미안함에 가족들이 좋아하는 카레를 한 냄비 끊인다. 저녁밥 준비를 끝내고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한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로 손길 한번 주지 않은 ‘파운데이션’을 꺼내 얼굴에 열게 펴 바른다.  생기가 흐른다. 작년보다 몇 줄 더 생긴 눈가 주름이 야속해 억지 눈웃음으로 덮어보다가 이내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장롱 속에서 1년을 묵묵히 기다린 코드를 걸치고 집을 나선다.


  협소한 주차장의 불편함에 외부 주차를 하고 호텔에 마련된 졸업식장에 들어선다. ‘풍선과 줄 반짝이 장식 그리고 장미와 안개꽃’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졸업식 풍경이다. 늦게 도착한 후배라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보지만, 준비된 잔치에 멋쩍은 손을 거둔다. 그때 행사 진행 측에서 “서울에서 오시는 담당 교수님이 좀 늦을 예정이니 식사를 먼저 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나는 여유를 갖고 뒷자리에 위치한 4학년 졸업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에게 오늘은 이 대학의 마지막 날이다. 

 소박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교육인의 밤’ 이 시작되었다. 눈으로 익숙한 행사는 내빈소개부터 축사, 시낭송 등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고, 1부 말미에 4학년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검은 학위 복 위에 사각 학사모를 쓴 졸업생들이 무대로 등장했다. 졸업장을 수여받은 그녀들은 장미와 안개꽃 한아름 안고, 무대 위. 아래 두 줄로 서서 단체 졸업 사진을 찍는다. 그녀들은 멋진 은발이 군데군데 수놓은, 반 백 살을 훌쩍 넘기신 분들이다. 이 또한 방송통신대학교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다. 첫 학기, 생전 첫 발을 떼면서 발바닥에 생채기가 생기고 굳은살이 박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오랜 기간 쉬다가 중간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고, 오로지 혼자 해내야 하는 방통대 특성상(지금은 스터디와 공유 기능이 발달하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거는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학기마다 등록과 미등록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을 것이다. 입학생 중 2학기 등록률이 50프로라고 하니, 만학의 길이 그리 편안하고 아름다운 꽃길만은 아니다.

  그때 3학년 학우 중 누군가가 졸업생을 바라보며  '시원섭섭함'이라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본 그녀들의 얼굴에는 '졸업한다는 아쉬움과 해냈다는 뿌듯함' 보였다. 늦은 나이에 선택한 이 길 사이사이에 아쉬움이 없는 구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무던하게 걸어 사각모를 썼으니 뿌듯함도 있을 것이다. 축사를 읽던 학생회장 눈물 또한 그런 마음이라 어림짐작 한다. 사람마다 걷는 보폭이 달라 바쁨과 여유로움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오늘 결승점에 도착한 그녀들에게 나는  '수고'의 박수를 보낸다. 


 졸업식이 끝나고 드디어 2부 ‘레크리에이션’을 알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진행자가 등장한다. 중년 여성의 아담한 키 에 검은색 기지 바지와 뒷단추가 있는 흰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얼굴의 처짐이 보이는 네모난 얼굴에 긴 머리를 불끈 묶은 그녀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평범한 이웃집 아주머니 모습이었다. 내 눈에 익숙한 반짝이 의상을 입고 화려함과 강렬함을 겸비한 진행자가 아님에 실망했다. 그런데 그녀가 마이크를 드는 순간, 내 생각은 빗나갔다. 속사포처럼 솟아내는 입담과 센스 그리고 현실과 외설을 넘나드는 몸놀림으로 전체 분위기를 단번에 장악하는 반전의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그냥 평범한 옆집 아주머니가 아닌 프로페셔널했다. 

 2부 전반부에 특별출현 대선배들의 ‘노래와 아코디언 연주’가 이어지고,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을 때, 진행자는 학년별 장기자랑을 진행한다. 2학년 대표의 ‘망부석’을 시작으로 4학년에 이어, 우리 학년인 3학년 대표 학우는 신발 벗는 투혼과 무대를 누비는 열정으로 ‘아모르파티’를 불렀다. 그런데 코러스 역할의 뒤 풍경 우리들은 노사연 ‘만남’에 어울릴 법한 손 물결과 박수만 열렬히 쳤다. 아쉽게도 우리 학우들은 마음의 열정만큼 밖으로 표출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마지막 순서로, 학년으로 1학년이지만 연령으로 제일 많아 보이는 ‘애송이’ 후배들의 무대였다. 그런데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 과대표만 빼고 모두 ‘돼지, 고릴라, 개, 원숭이, 사자 등‘ 기괴한 동물 탈을 쓰고 엉거주춤 걸어 나온다. 그중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돼지 탈을 쓴 학우에게 진행자가 다가간다. “혹시 안 보이세요”라고 묻자 돼지는 고개를 끄떡인다. 사자에게도, 고릴라에게도 물으니 역시 안 보인단다. 몇몇 탈을 제외하고 눈과 입 구멍을 뚫지 않은 탈을 쓰고 나온 것이다. 우리의 웃음은 그때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그 연세에 앞이 안 보이는 탈을 쓰고 막춤을 춘단다. 얼마나 웃기는 조합인가. 음악이 시작되자 동물들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 돼지 탈‘이 뒤로 넘어지며 반짝이 장식품을 짓누르고, 사자는 왔다 갔다 술 취한 취객처럼 움직이고, 고릴라는 앞이 어디인지 몰라 뒤로만 보고 있다. 그러자 진행자는 “나이 들어서 넘어지면 큰일 치릅니다.”라고 말하며, 모두 무대 아래로 모시고 와서 앉힌다. 그리고 음악의 볼륨을 높이자 동물 탈들은 손과 윗몸 그리고 발을 움직이며 열심히 흔들어 댄다. 막춤을 넘어서 의도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몸 개그와 활활 타오르는 열정에 우리는 배꼽을 상실했다. 진행자와 1학년의 계획되지 않은 롱 타임 공연이 끝나고, 그녀들이 자리로 돌아간다. 자리에 앉으며 탈을 벗는데, 빗방울 같은 땀방울이 그녀들의 열정과 함께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교육인의 밤과 졸업식’은 끝이 났다. 레크리에이션 진행자 덕분에 즐거운 밤이었지만, 나에게는 손톱만큼의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나에겐 당첨 ‘운’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 보물 찾기를 시작으로 마트의 경품추천 그리고 여타 행사 추첨까지 ‘운’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오늘도 참석자 한 명씩 다 돌아간다는 상품마저 나를 외면했다. 그런데 좌측 정희선생님이 받은 선물 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고, 우측 정남선생님이 선물을 받으러 나가라며 나를 부축이며 위로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들이 나의 ‘운’ 일지도 모른다. 지난 1년을 함께 걸어주었고, 시작하는 1년도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당첨 운’이 없는 나에게 ‘사람 운’이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밤이다.

 내년에 나는 이 자리에 한 번 더 오게 될 것이다. 그날은 나의 졸업식 날이다. 그러기 위해 시작하는 한해도 열심히 걸어야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길은 비포장도로이며, 내 발은 까이고, 쓰라린 통증을 느낄 것이다. 학기마다 ‘등록’의 갈등이 찾아오겠지만, 지나온 날들처럼 무던하게 걸을 것이다. 대학졸업장이 그다지 큰 영광이 아닌 지 오래되었지만, 입학에서 졸업의 시간 동안 나를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이끌어 준 시간이었다면 그 졸업장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삶은 가봐야 알고, 해봐야 안다’는 엄마의 말씀처럼 무엇이든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없고, 그냥 된 것들이 있다면 내면화되지 못하고 소멸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내 것이 된다

작가의 이전글 2022년 여름  작가‘오영수’와 마주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