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일까?
새벽에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양수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산부인과 전공의로서 양수가 터지면 바로 병원에 와야 합니다 라는 말을 산모들에게 수 없이 했건만, 막상 나에게 닥친 첫 '흐르는 느낌'은 양수인지 증가된 분비물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3년차로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전공의들이 진통 걸리기 직전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근무를 하다가 (심지어 수술을 하다가도) "저 진통이 걸렸으니 (또는 저 양수 터졌으니), 애 낳고 오겠습니다." 이런 식의 말을 산부인과 여자 전공의들이 교수님들께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약 한 시간쯤 지나서 한 번 더 흐르는 느낌이 생겼지만, 다리까지 흘러내린다 거나 속옷을 흠뻑 적시는 전형적인 양막파수의 양상은 아니었기에, 나는 출근과 입원 준비를 둘 다 갖추고 스스로 운전하여 병원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전하는 동안 진통이 아직 안 생긴 것이 다행이다.)
병원에 도착해서 산부인과 동기이자 절친인 L에게 진찰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아닌 것 같았으나, 결국 양막파수로 판명이 났기에 그 날의 하루가 근무 모드에서 진통 모드로 전환되었고, 아침부터 촉진제를 맞았다. 다행히 진통이 잘 왔고 오후 4시경에는 자궁문이 10 cm로 다 열린 상태가 되었다. 무통 마취 시술을 받았지만 98년도에는 자궁 문이 다 열리고 힘을 주는 기간 동안에는 마취약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에 자궁문이 다 열린 후에는 본격적인 산통을 모두 느끼면서 힘주기를 시작하였다. 약 30 초 정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이 폭풍 또는 파도처럼 몰아치다가 약 2분 정도의 회복 시간이 제공되었다. 동료 산부인과 전공의들이 힘을 주라고 옆에서 격려를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힘을 어디에다 주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2시간이 흘렀다.
나는 작은 키에 아기의 머리는 상대적으로 크고, 힘을 효과적으로 잘 주지 못하는 손이 많이 가는 진통실 2번방 산모가 되어 가고 있었다. 중간에 나는 작은 소리로 '못할 것 같아요' 라고 말했는데, 아기를 받아 주실 당시 산과 전임의 선생님께서 '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씀해 주셔서 큰 위로를 받았다. 만약 당시 선생님께서 '수영아, 수술해야 겠다' 라고 한 마디만 하셨다면, 나는 바로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수술장으로 흔쾌히 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힘을 효과적으로 못줄 때는 탄식의 소리가 들렸고, 조금 잘 줄 때는 응원의 소리가 들렸다. 지쳐가는 나를 위해서 김ㅇㅇ 선생님은 흡입 분만으로 나의 고통을 줄여 주셨다. (김ㅇㅇ 선생님, 감사합니다!) 약 2시간 반의 힘주기 끝에 태어난 아기의 체중은 3.3kg이었고 이 때 나의 나이는 28세였다.
5년 후 나는 둘째를 낳게 되었다. 일요일 새벽 4시경 갑자기 진통이 걸려 병원에 갔으며 무통 분만은 여러가지 이유로 하지 않았다. 진통의 정도는 첫째 때와 비슷했지만 확실히 전체적인 진통 시간을 짧아져서 오전 9시에 2.9kg의 아기를 낳았다. 역시 힘을 잘 주지 못하여 흡입 분만의 도움을 받았다. (김ㅈㅎ 선생 고마와요!) 간혹 흡입 분만이 아기에게 나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마다 나는 두 아기를 모두 흡입 분만으로 낳았다고 자신있게 답한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출산 당일 허리와 회음부 통증으로 마약성 진통제 주사까지 맞아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둘째 때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역시 초산과 경산은 많이 달랐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회복실에 들어오신 친정 엄마의 말씀 '고생했다. 수고했다'라는 말을 들으며 눈물이 났고
둘째 때에는 같은 회복실에서 왠일인지 이미 5살이었던 첫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양수에 불어서 퉁퉁한 얼굴로 태어난 두 딸들은 이제 모두 성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출산의 그 파도 같은 고통, 아기를 만나기까지의 긴 시간들, 진통실에서 얇은 침대보를 두 손으로 꼭 움켜 잡으며 효과적이지 않게 힘을 주면서 눈물 찔끔 흘렸던 시간들은 나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잊지 못할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