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도장을 찍어야한다

[장편소설 연재] < 사랑학개론 > 유정 이숙한

by 유정 이숙한

순미는 수철과 약속을 어긴 벌로 점심을 먹어야 했다. 그에게 잡아떼면 그만인데, 수철의 의지대로 끌려다닌다. 그는 ‘내 여자로! 아내감으로’ 찜하고 운명의 끈으로 순미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들은 한강이 보이는 길을 따라 노량진에서 한 시간쯤 걸어 흑석동 양식집으로 갔다. 비프커틀릿을 주문한 순미. 어색한 칼질을 하고 있다. 수철은 거미가 실을 풀어내듯 청산유수처럼 말을 한다. 분위기 있는 경양식 집을 꿰고 있다. 후식으로

커피도 마시고 시간을 보냈다.


며칠 후 수철은 노량진 언덕 위에 있는 순미가 다니는 교회를 찾아갔다.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너무 지루하다.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 피우고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순미는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수철이 회사를 옮겼다. 수철은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그의 인생이 나락에서 떨어져 어둠 속을 헤맸다.

꿈도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면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순미는 수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궁금했지만 잊고 있었다. 2주쯤 지나자 수철이 순미네 회사 구내식당 앞에 나타났다. 작은 성냥갑에 근부하는 회사의 전화번호를 적어 순미에게 건네준다. 그는 옆구리가 툭 터진 줄무늬 녹색 남방을 입고 있었다. 순미에게 바늘쌈지를 건네받은 수철은 당황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남방을 꿰매고 나왔다.



수철과 순미는 월미도에 갔다. 2층 카페에서 낙조를 감상하면서 돈가스를 먹었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월미도 바다를 감상하며 걸었다. 밤 9시다. 순미는 부평의 집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 버스에 발을 올렸다.

수철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순미 씨 나만 남겨두고 갈 거예요? 가지 마세요! 오늘은 나랑 있어 줘요!”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기처럼 떼를 쓰는 수철이다. 그녀는 버스에 올린 발을 내렸다. 수철이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늦으면 자고 가요. 방 두 개 빌리면 되니까요. 걱정하지 말고 통금 전까지 우리 걸으면서 이야기 나눠요."

통금시간이 가까워졌다. 자유공원 아래 작은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순미는 지갑이 두둑하니 방을 두 개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수철이 주인에게 눈짓을 한다. 주인은 방이 한 개밖에 없다고 잡아뗀다. 수철은

"순미 씨, 나 믿지 못해요? 난 이렇게 여기서 자고 순미 씨는 저기 아랫목에서 자면 돼요. 먼저 씻어요."


순미는 내키지 않아 엉거주춤 서 있었다. 일단 세면장에 가서 몸에 묻은 땀을 씻어냈다. 수철은 씻고 오더니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으로 누웠다. 순미가 말렸으나 바지를 입고 자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순미는 치마를 입은 채 그대로 앉아있다. 수철이 옆에 누우라며 재워준다고 했다. 그 말을 믿는 어리석은 순미다.

2시간을 걸은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이야기로 밤을 채우더니 수철이 먼저 잠이 들었다.



한밤중이다. 잠결에 이상한 느낌이 든 순미가 눈을 떠보니 수철이 그녀의 몸을 만진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치마 위에서 그곳을 더듬었다. 순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났다.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이러시면 안 되지요?”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늑대의 눈빛으로 변해 그녀의 배 위에 올라가더니 옷을 입은 순미에게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순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날 책임 질 거예요?"


새벽이다. 순미는 어렴풋이 잠들었는데 수철이 안절부절못한다. 암탉이 알을 품고 병아리를 부화시키기 위해 앓는 소리를 한다. 한계에 도달했는지 배 위로 올라갔다. 순미는 치마를 입은 채 당황하지 않고 따졌다.

"그럼 날 책임 질 거여요? 책임진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수철은 거친 숨을 몰아쉰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런 순간이 자주 오는 건 아니다. 순미는 어렸지만 당돌했다. 첫사랑 순이처럼 도장을 찍어 놓지 않으면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나버릴 거 같아 맘을 놓을 수 없는 수철이다. 80년대 통설이었지만 운명이다.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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