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사랑학 개론> 유정 이숙한
밤새 술을 푼 탓인지 목이 타더군, "여보 물 줘?" 했는데 아무 대꾸가 없는 거야? 전날 밤 일이 희미하게 기억나더군. 오전 열 시가 넘었어. 가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 한산한 거리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더군. 세상이 답답한 내 마음처럼 회색빛에 잠겼더군. 옆에 있을 땐 숨이 막히는 것 같더니 막상 없으니 허전하더군.
닭튀김솥을 내려놓고 냄비에 라면을 끓였네. 얼음냉장고를 열고 김치통에서 김치 몇 쪼가리 꺼내 라면과 먹었는데 맛이 영 없는 거야, 국물만 마시고 싱크대에 쏟아버렸네. 과음한 탓인지, 못난이가 없어서인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사방이 막힌 공간에 갇힌 것 같았어.
오후 한 시가 넘자 빗줄기가 굵어지고 온통 회색 어둠에 갇혔네. 내 가슴에 쌓인 고독이 비가 되어 내렸어.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성냥을 그었으나 습도가 높은 탓인지 성냥개비만 부러지더군. 몇 번의 시도 끝에 작은 불꽃이 맺혔네. 폐 속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지. 참았던 연기를 '후' 뱉어냈더니 마음이 가라앉더군. 태풍이 큰비를 몰고 오렸는지 우르릉 쾅쾅 지랄을 떨고 있었어.
옆가게 덧문 여는 소리가 들렸네. 뭐에 홀린 사람처럼 옆 가게로 갔어. 쇼윈도에 걸린 옷가지들과 눈이 마주쳤네. 그것들이 쑤근대더군.
"바보, 칠푼이, 아내도 챙기지 못하는 멍청이…"
중얼대는 그것들의 주둥이를 확 찢어버리고 싶었네. 그것들이 독사처럼 세모진 눈을 뜨고는 째려보더군.
땡땡이 아가씨가 나와 쇼윈도 옷들과 싸우는 소리를 듣더니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소라 아저씨, 웬일이셔요? 이리 들어오세요, 모닝커피 한잔하세요."
난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땡땡이 아가씨의 눈치를 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네.
"미스 선, 돈 좀 있어요? 집사람이 친정에 급한 일이 있어 돈을 가지고 가서 그러는데, 생맥주 받을 돈이 모자라서요?"
"20만 원 빌려줄 테니 저녁에 주세요, 낼 아침에 물건 떼러 가야 해요?"
고맙다고 인사하며 나오는데 뒤통수가 간지러워 머리를 긁적였어. 쇼윈도 옷들이 입을 틀어막고 깔깔대며 비웃고 있었어.
종일 치킨 주문이 뜸하더군. 못난이가 있을 땐 줄을 서야 했는데,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이 못난이가 사람을 불러들이는 재주를 가진 것 같았어. "비도 오고 출출할 텐데. 어째 통닭을 사러 오지 않는 거야?"혼자 투덜거렸지. 손님이 오지 않아 답답한 건지, 아내가 없어 답답한지 죽을 맛이었네.
형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가 거기에 갔는지 물어볼 수 없고. 결혼을 반대하던 처남에게 전화를 걸 수 없는 노릇이라 난감했네. 쇼윈도 옷들이 콧방귀를 뀌며
"칠푼이가 배는 고프냐? 있는 돈 다 술과 바꾸고 그것도 모자라 술값 준다고 아가씨들 데리고 오더니, 아내는 필요 없고 친구만 있으면 된다며? 홀아비 되니 좋냐, 꼴좋다!"
"헛소리 말아, 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나저나 뭘 좀 먹어야 하는데?"
오후 일곱 시인데 밖은 검은 회색에 잠겨 칙칙하고 무거웠네. 치킨 몇 마리 배달하고 나니 손님은 오지 않고 침묵 속에 홀로 갇혔네.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데 옆가게 땡땡이 아가씨가 가게 문을 배시시 열고 들어오더니
"소라 아저씨, 빌려드린 돈 주세요, 낼 아침 일찍 물건 하러 가야 해요?"
돈 통에서 만 원짜리까지 스무 장을 빼고 나니 만 원짜리 대여섯 장과 천 원 권 지폐 몇 장 남더군. 땡땡이 아가씨 돈을 갚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졌어.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남은 돈을 챙겨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지.
입간판의 불을 끄고 셔터를 내리고 기름이 엉긴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신고 간이 부엌으로 나가 자물쇠를 채웠네. 담배를 한 갑 사고 '아이와'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형의 집으로 갔지.
고지식한 형은 내가 아내에게 손찌검한다고 야단을 치더니 부산 처남집으로 내려갔다고 하더군! 영영 이별일 수 있으니 데려올 수밖에. 내가 못되게 굴었거든, 밤일도 해주지 못하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