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편소설 연재 ] < 사랑학 개론 > 유정 이숙한
진영은 절규에 가까운 말을 뱉어놓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말쑥한 정장으로 차려입은 진영은 성격 좋고 신앙심 또한 좋았는데 순미도 무척 아쉬웠다. 진영이 말했다.
"미대 다니다 군 복무로 2학년 때 휴학하고. 독신으로 살 거라고 장담했는데, 말이 그렇지, 군에 입대하니 순미 씨가 제일 먼저 떠 오르고 보고 싶었어요, 가게로 여러 번 찾아갔지만 갈 때마다 허탕만 치고 애꿎은 귤이랑 사과만 사 왔어요. 너무 아쉬워요! 순미 씨를 만나면 이런 내 마음 전하고 싶었어요!"
진영은 순미의 친구 명옥과 같은 교회에 다녔다. 청년회 일원이었고 명옥을 좋아했다. 명옥은 예쁘고 날씬하여 주변엔 남자들이 들끓었다. 명옥은 어떤 남자든 두 번만 만나면 이유 없이 그 남자가 싫어지는 변덕스러운 친구였지만. 속정이 깊고 변함없는 순미의 친구였다.
진영은 출근길에 순미와 자주 마주쳤다. 만날 때마다 껌을 한 개 나눠 주었다. 아담한 키였지만 선량하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진영이 고3 때 버스에서 마주쳤는데 순영에게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순미는 힘들어도 조금만 견뎌보라 하였고 진영이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진영이 방황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추스르고 미대에 들어가서 잘 다니고 있었고 명옥을 좋아하는 것 같아 진영에게 관심이 있었으나 마음을 접었다.
언젠가 순영의 등굣길에 버스에서 만난 진영이 말했다.
"나 어떻게 하지? 미술을 하자니 어머니가 힘들어하시고. 가업을 물려받자니 내가 버티기 힘들어. 난 장래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거야, 난 그림을 그리면 행복하니까."
"선배님,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하세요, 어머니께 말씀드려요, 좀 서운해하시겠지만. 어머니도 언젠가 선배님을 이해하실 거예요, 어머니의 뜻을 꺾지 말고 군 복무부터 하세요, 다른 생각은 제대 후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진영이 총각, 어머니가 안 계셔도 힘내고 굳세게 살아, 어머니처럼…"
진영은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순미 엄마가 진영을 위로했다. 백 마디 말보다 고마운 진영이다. 순영의 엄마에게 순미를 반려자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진영이 용기를 내어
"순미 씨는 잘 있나요?"
"우리 순미? 서울 회사에 다녀, 멀어서 기숙사에 들어갔어. 토요일마다 집에 와."
진영은 잔뜩 기대했는데 힘이 쭉 빠졌다. 순미와 함께할 미래가 회색빛 안개에 싸였다.
순미가 토요일에 집으로 내려왔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요일 아침 8시경 집 앞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성가 연습을 해야 하니 일찍 서울로 올라갔다. 진영이 애타게 기다리는 줄 꿈에도 몰랐다.
진영은 아침 8시 45분경 가게에 왔으나 허탕을 쳤다. 순미 그림자로 볼 수 없었다. 진영은 미대 복학을 포기하고 취직하여 직장에 다녔다. 교회에서 나름대로 봉사하며 지냈다. 명옥이도 직장을 따라 수원으로 이사 가고 없고 반려자로 삼고 싶은 순미도 없다. 운명은 쏘아놓은 화살처럼 3년의 시간을 삼켜버렸다.
어느 날 수철의 눈에 바보상자의 얼룩이 보였다. 순미의 빰을 때렸을 때 코피가 튀긴 것이었다. 수철은 반성했다. 다시는 손찌검을 하지 말아야지 맹세했다. 순미가 부산으로 토끼며 통장이랑 돈을 몽땅 가져가서 미치고 팔짝 뛸 거 같았다. 달려가서 때려죽이고 싶었으나 달래서 데려왔다. 자고로 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두드려야 한다고 농담으로 말하던 수철이 어느 순간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 마음은 아닌데 그가 왜 그런 걸까,
순미는 수철에게 밤중에 뺨을 얻어맞았을 때 구차하게 살기 싫었다. 주방에서 칼을 가져와서, 자존심 상해 맞고 살 수 없으니 죽이라고 했다. 순미는 꿈을 먹고사는 여자다. 수철은 가정주부이면 아이들이나 남편을 건사하며 사는 거라며,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면 뭐 하겠다며 주제 파악 좀 하고 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한 달에 한두 번 안아줘도 감지덕지하며 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