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편소설 ] < 사랑학개론 > 유정 이숙한
1980년대 중후반 그들은 국내 굴지의 N백화점에 입점했다. 수철은 사람 사이에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의리 중심으로 기업을 경영했다. 백화점은 매출이 잘 나와야 좋은 자리를 준다. 좋은 자리는 프리미엄 붙었다.
그는 좋은 제품을 자존심 상하게 웃돈을 얹어주고 제품을 팔고 싶지 않았다. 돈을 달라는 담장부장이 미워 폐점 시간보다 한 시간 앞당겨 철수했다. 백화점 개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순미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배송기사와 함께 반찬 몇 가지와 겉절이를 새로 만들어 도착했다. 그것은 제품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멋지고 인기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형제가 보고 싶지만 처진 어깨를 보이기 싫어 만나지 않는다. 그에게 자존심은 삶에 대한 몸부림이며 외침이었다. 그는 부정적인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작은딸을 먹인다고 음식을 싸다 준다. 두 사람은 원수가 아닌 친구처럼 지낸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도 몇 가지 해다 주었으므로 그나마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수철은 순미에게 받는 거에 길들여졌다. 딸들은 챙겨도 그녀를 챙기지 않는다. 두 번째 이혼 후 남남인데, 호흡 곤란으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비싼 한약을 지어준 그녀를 알 수 없다. 그녀가 전생에 그에게 큰 빚을 진 걸까, 그는 자존심을 교회 첨탑에 맡겨두었다.
그의 자존심의 씨앗은 중학교 때 생성되었다. 학기 초 가정환경 조사를 했는데, 담임이 "엄마 없는 사람 손들어?", "아빠 없는 사람 손들어?" 수철은 손을 두 번 들 수밖에 없었다. 숨길 수 없는 사실과 진실이니까,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담임에게 미운털이 박혀 일 년 내내 밑바닥을 기어야 했다. 반 친구들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담임은 덧붙여서 하는 말이
- 두 분이 다 없는 거네, 양아치가 따로 없다…?
인격 수양이 되지 않은 스승이 영혼이 맑은 제자에게 양아치라고 불렀을 때 어린 그는 기분이 더럽고 서러웠다. 멱살을 쥐고 패주고 싶었으나 참았다. 어른이 되어 만나면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줄 거라고 다짐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30년 후,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중학교 때 담임을 만났다. 혈기 왕성한 그는 사십 대. 담임을 두들겨 패주려고 다가갔더니, 순미가 노인네 때리면 감방에 들어간다고 뜯어말려서 간신히 참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인성과 자질이 없는 스승이다. 사립학교이니 재단에 발전 기금을 냈거나 친인척이라 교사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수철은 부정적이며 삐딱한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토록 그녀의 인생을 쥐고 흔들던 사람이 몹쓸 병으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 병은 희귀 질환이라 치료 약이 없으며 병세가 악화되지 않게 도움을 줄 뿐이다. 그가 응급병동에서 퇴원할 때 담당 교수가 코에 산소를 공급받는 처방을 내줬으나 따르지 않았다. 산소줄을 끼고 사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P 한약을 처방받아 그녀 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호흡 곤란으로 화장실 출입도 못하고 침대에 갇혀 사는 와병 환자로 전락했다. 한약 복용 후 5개월이 지나자 비염이 사라지고 콧속 필터링인 코털도 생겼다.
지긋지긋한 기침과 기도를 막고 있던 가래도 사라졌다. 요양 보호사가 4시간 그를 돌봐주는 시간이면 그녀는 잠을 자거나 쉬기도 하고 고질병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있는 순미에게 호흡 곤란으로 힘들다고 전화했다. 수철은 순미의 마음속에 품은 바람에게 갈 거 같아 늘 불안했다. 그는 순미의 마음속에 바람을 담고 사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바람에게 가서 그의 곁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았다.
순미는 그를 위해 밥을 지어 말려 미숫가루로 만들었다. 수철은 그녀에게 버려지기 싫었다. 그녀가 건강하고 잘난 시인회장을 만나는 상상을 한다. 순미가 옆에 없으면 불안하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싹이 튼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