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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전기지민 Nov 11. 2024

언어치료사가 알려주는 무조건적인 수용

우리는 무조건적인 존중과 수용을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만난다

 *이 글은 '참고 도서: 감정조절이 필요한 순간 - 서정선 지음'을 참고했으며 독후감의 형태로 책 내용이 많이 수록되었고 글쓴이(나)의 개인적 의견을 포함하였다. 


 '최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가. 긍정적인 단어지만 우리에게 참 부담이 된다. 살면서 최선을 다하자는 말을 듣고 또 직접 하고 살았다. 중요한 것은 최선의 기준이 각자마다 다르다는 거다. 100명이 있다면 최선의 기준은 100개다. 결과가 누구에게는 만족스럽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정도일 수 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도 잦다. 만약 당신이 그 때에 조금 더 노력했더라도 그게 최선이라고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를 만족시킬 방법은 없다. 


1. 최선의 크기는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고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 

 당신은 늘 어떤 일을 해놓고 나서 한 것에 대한 칭찬보다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만약 친구가 이런 상황이라면 뭐라고 말할 것 같은가. 도전해 본 것으로, 그 일을 시도한 것으로 잘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왜 자신에게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는다. 왜 당신은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되는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내어주고 정성을 쏟는다는 것, 그 자체가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최선이란, 과정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가질 때 빛을 발한다. 나는 하루를 보내고도 의미 있는 하루를 꽉 채우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었다. 그저 건강했다는 것, 힘든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가족이 모두 잘 귀가했다는 것, 식사를 맛있게 잘 했다는 것만으로 하루를 잘 보낸 것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하루를 가치와 의미로 가득 채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자신에게 따뜻하게 말해주자. 오늘 하루도 살아 있어줘서, 건강해줘서, 이 거친 세상을 그저 살아줘서 고맙다고. 


2. 경청하는 것은 나 타인을 비롯해 나의 자아와도 만나는 일이다. 

 나는 심리상담을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받는다. 내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상담가는 내담자의 말을 듣되 판단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랬겠군요, 하고 반응하면서 나 스스로가 말을 하면서 답을 찾게 돕는다. 경청이라는 것은 마음의 벽을 허문다. 경청을 경험하면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경청해야겠다는 열정을 끓게 한다.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사람은 위로를 얻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상대의 말에 굳이 해답을 내려주지 말고, 상대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며 듣는 일에 집중해보자. 사람 하나 살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자신의 내면의 말을 잘 들어보자. '사실 난 오늘 좀 힘들었어. 난 견디기 힘들어.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했어.' 같은 말을 하진 않는지, 자신이 오늘 느낀 감정을 세세하게 듣고 위로해보자. '그랬구나. 속상할만 했네.'


3. 우리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부모들이 자식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어릴 땐 안 그랬는데 점점 예민해져요. 안하던 행동을 해요.' 

 아마 부모가 아이에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던 건 아닐까. 나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아이였는데 우리 엄마는 내가 크면서 예민해졌다고 말했다. 성격이 밝고 유했는데 언제부터 까칠하고 딱딱해졌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런 모습을 엄마가 보지 못했을 뿐, 난 그런 부분이 늘 있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대에 대해 다 알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자신이 아는 모습으로 그 사람을 고정시키려 한다. 자기 관점에서 벗어나 타인을 투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벗어야 한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를 오해해서 잃은 경험이 있다. 가까워서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나 때문에 오랜 시간을 힘들어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픔을 알지 못했고 그 친구의 아픔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말았다. 익숙한 관계일수록 상대의 행동에 내 행동을 추가해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넓게 볼 수 있다. 

4. 작별을 고하는 과정은 우리가 한 인간으로 성숙에 이르는 길이다. 

 이별의 아픔은 당연히 아프지만 반드시 성장으로 이어진다. 이별의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장을 경험하기도 하고 대인 관계의 수용 폭이 넓어지기도 한다.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여 이별 전보다 오히려 성장하기도 한다. 


 '그 사람을 향하던 시선을 이제는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자.'


 지금 이 순간에는 너무 아파서 내뱉을 힘조차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 이전과는 또 다른 나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애도의 시간을 잘 보내자. 

 애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대상을 상실함에 따른 정신적 고통, 아픔을 서서히 극복하고 평정을 찾아가는 과정, 좋은 혹은 아픈 추억 모두를 끌어 안았다가 또 놓아주기를 반복하면서 현재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당신이 떠나보내야 하지만 떠나보낼 수 없는 슬픔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면 이제는 충분히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나는 아직도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 존재가 생각이 나면 뭉클하고 눈물이 나고 아프기도 하다. 그러나 감정을 억누르기 보다 울컥울컥 올라올 때마다 흘려보낸다. 그렇게 내게서 조금씩 떠나보내고 있다. 애도의 과정은 지난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분명하게 상처 없이 지워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5. 이해한다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그 무언가에 대해 헤아려보는 마음이다. 

 '이해, 수용, 존중'은 타인과 나에게 꼭 필요한 무엇이다. 자기 비난과 비판, 질책으로 몰아 붙여서 잠시 성취를 이뤄낼 수 있겠지만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기는 어렵다. 상대의 의견이나 생각을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온전히 수용해보자. 세상에는 정답이 없기에 모두가 느끼는 생각이나 마음은 수용되어야 한다. 이제는 억지로 고치려하거나 바로 잡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저 이해해보자. 상대도 잠시 길을 헤매겠지만 결국에는 중심을 잡고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다. 잠깐 실수해도 또 뉘우치고 결국에는 잘 해낼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왜 그렇게 존중받고 수용받기가 어려운 걸까. 뭐 그런 일에 화를 내니?, 같은 말을 듣고 살아야 할까. 네가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자. 나도 돕고 싶어, 같은 반응은 왜 어려울까. 먼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수용해보자. 


 당신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이고 소중한 존재다. 무조건적으로 수용받고 이해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당신을 몰아세우지 말고 사랑하고 상대에게도 그렇게 흘려보내자. 됐다. 이만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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