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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되는 법에 관하여

by 안전기지민

나에게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온전히 수용해 줄 나무가 두 그루 있다. 한 나무는 심리상담가이고 한 나무는 나 자신이다. 나는 35년이라는 세월을 즉각적인 감정의 노예로 살아왔다. 즉시 해소되지 않으면 폭발해 버리는 이기적인 존재였다. 그런 내가 치유된 것은, 아니 치유되어 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심리 상담을 시작한 뒤로 나는 부정적 감정을 다루는 법,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수용하는 법, 나 자신이 편해지는 법 등을 배웠다. 내가 치유되면서 배운 몇 가지를 소개하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먼저 간단히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꽤 오랜 시간 언어치료사로 일했다. 언어치료란 취학 전 또는 학령기 아동들의 언어 발달을 돕거나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언어적 기능을 상실한 대상(대부분 성인)에게 언어 재활을 진행했다. 병원에서 근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양한 실어증 환자들을 만났다. 뇌에 생긴 문제는 신체 기능 이상을 동반했고 심리적 문제를 크게 동반했다. 그들의 보호자들 또한 환자를 돌보는 동안 지쳐갔다. 아픈 사람을 보호하고 돌보는 일은 자신이 단단히 서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심리적, 정서적으로 아픈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게 바로 심리 상담 또는 심리 치료다. 내가 내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일을 했다. 늘 어딘가 상처 입은 사람들을 마주하다 보니 나 또한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고 이제는 멈춰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게 사직을 하고 당진이라는 외곽으로 내려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치유될 줄 알았지만 우울증은 더 깊어졌고 가로막힌 벽이 내 앞에 있는 듯한 기분,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인해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던 중에 예상치 못하게 임신을 했다. 우리 부부는 5년 간 아이가 없는 결혼 생활을 했었기에 아이를 가졌다는 큰 기쁨을 느꼈지만 약을 중단할 자신이 없었다. 20대 초반에 시작된 공황장애는 서른 중반이 되어서도 불안과 불면으로 나를 괴롭혔다. 약 복용 외에 심리치료나 인지행동치료로 극복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인생에 늘 나쁜 일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고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전국민마음투자지원사업’을 우연히 알게 되어 24년 하반기에 한 번, 25년 상반기에 한 번, 두 번의 기회로 지금까지 총 16회기의 상담 기회를 얻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회복탄력성’이라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누군가는 그 힘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지만 노력하면 키울 수 있다. 회복탄력성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겪고 일어설 때 더 커진다. 원치 않았지만 내 삶에 찾아온 공황장애는 심리치료를 통해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갈 기회도 같이 가져다주었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픈 자를 위로할 수 있다. 내가 정서적인 아픔을 겪었기에 앞으로 언어치료 대상자들과 보호자들에게 더 깊은 공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나무가 되어줄 준비가 되었다. 또한 누군가를 늘 필요로 하던 나 자신도 내가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 자신이 가장 큰 지지자가 되었다. 2025년 초에 만난 ‘정(가명)’이라는 상담가와의 이야기를 통해 그 치유의 과정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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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서 만난 ‘정’은 말 그대로 우아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그녀의 인생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결혼 후 긴 시간 미국에서 공부하는 남편을 내조하며 타향 살이를 했으며 누구의 도움 없이 아이 셋을 낳아 길렀다. 연고 없는 당진에 정착하기까지 그녀는 외로움과 공허를 감내해야 했다. 피하지 않고 인생의 온갖 풍파를 다 받아낸 그녀는 초인 같았다. 그녀의 눈빛은 따스했으며 자세는 곧았다. 내가 말을 할 때는 눈과 몸을 내게로 기울여 온몸으로 들어 주었다. 마치 내 말이 아닌 나를 받아주는 것 같았다. 첫 회기부터 그녀가 나의 나무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고 현실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아침부터 설레었다. 그러다 나는 출산을 했고 몇 달을 회복한 뒤에 아기를 안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시작은 늘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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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공감과 용기를 전해주는 언어치료사이자 작가 이지민입니다. 언어치료 대상자 뿐만 아니라 일상을 사는 모두를 위한 처방을 제시하고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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