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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 쓰는 사람

작가가 아니라도 그저 쓰는 사람이 되기

by 안전기지민


25년 9월에 나는 의지했던 친구와 관계가 끊어지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울하고 암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자다 일어나서 울었고 양치를 하다 울었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울었다. 밥을 씹어도 삼키지 못했다. 그러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원래 공황장애 약을 먹고 있었는데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픔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빈 화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 친구가 추천해 준 브런치에 글을 쓰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 번의 낙방이 있었지만 두 번째의 도전에서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저 울고만 있던 나에게 브런치라는 공간은 다시 일어설 무대가 되었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처방'을 내린다는 명목으로 글을 썼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버팀목이 될 수 있으니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 더 힘이 날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연재했다. 비록 우울한 시간을 보냈지만 어떻게 삶의 변화를 끌어내는지에 관해 글을 썼다. 운동이나 매일의 루틴이 우울을 예방한다는 기본적인 사실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글이 되었다. 우리는 알지만 슬픔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있을 때 보지 못한다. 글을 읽어서 다시 깨우쳐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쓰기와 읽기가 필요하다.


브런치 작가가 승인되었다고 연락을 받던 날을 잊지 못한다.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졸업할 때의 감동처럼 기쁨이 밀려왔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느낌, 효능감. 오랜만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손에 작은 조각 케이크에 촛불이 꽂혀 있었다. 내가 그토록 글을 좋아한다는 걸 알던 그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작가라고 불러주었다. 지지를 받으니 욕심이 났다. 책은 아니지만 브런치라는 공간이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작가라는 명분이 없어도 괜찮으니 그저 쓰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브런치는 그저 우울증 환자이던 내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해 주었다. 감투를 쓰니까 그에 걸맞게 행동하게 되었다. 나는 어디서나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구상했다. 글을 쓰기 전까지 어떤 내용을 쓸지 고민하고 정보를 모으는 과정도 의미 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보고 생활에 힘을 얻어 가길,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동력을 얻길 간절히 바랐다. 댓글에 나로 인해 힘을 얻었다는 말을 보면 뿌듯했다. 얼굴도 모르는 스치는 누군가가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어서고 싶었다. 더 나아진 모습으로 힘이 되고 싶었다.


그림 수업을 등록해 일주일에 두 번 다니기 시작했다. 운동을 다시 했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애썼다. 책을 읽었고 느낀 점을 글로 썼다. 그리고 심리 상담을 받았다.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며 안전기지 안에서 터놓을 수 있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내 진심을 말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의 루틴이 생기자, 우울을 느낄 시간적 공간이 줄어들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나아지고 있었다. 더 이상 외부로부터 힘을 얻지 않아도 나 안에서 나로 존재하는 힘이 세지고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남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나무가 되어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글을 연재하던 세 달의 시간은 내가 버티고 성장하는 구간이었다. 나는 새로운 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내게 이별을 주었던 사람이 브런치 글을 읽고 내게 연락이 다시 왔다. 내 글을 읽었다고, 내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줄 말을 하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그 말이 고마워서 나는 그 손을 놓지 못했다. 지난 일은 다 잊었고 아무렇지 않다고. 그렇게 브런치는 나에게 작가라는 세계를 주었고, 인연을 다시 돌려놓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더는 글을 쓰기 이전의 나는 아니라는 것,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이 계속 글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형편없고 미숙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아주 최악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늘 쓸 것이며 깨달을 것이며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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