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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Nov 09. 2021

폭력 일기

폭력 일기


엄지공주

학교에서 맨 처음 그린 그림에는

도화지 가득 나랑 눈사람이랑

나란히 서서 햇살처럼 웃고 있었지

뒷벽에 척 걸린 그림을 보며 내 키도 쑥쑥 자랐지

어느 날부터 그림 속 내 키가 점점 작아 졌지

저요! 저요! 천장에 닿을 듯이 손을 들었지만

짝꿍만 시키고 반장만 시키고

엄마가 백화점 옷 입은 아이만 시키고

내 손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지

도화지는 여전한데 내 키만 손가락만큼 작아 졌지

     

의자놀이

학교에서

의자를 가운데 두고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다가

호각소리에 앉는 놀이를 했다

노래는 음정과 박자지

열심히 손뼉 치며 노래 부르다 의자를 놓쳤다

엄마는

노래도 대충 부르고

의자 가까이서 돌아야 자리를 차지 할 수 있다고

아빠처럼 자리 뺏기지 말라며 종일 서 있던 다리를 두드렸다


피구놀이

학교에서 피구놀이를 했다

친구가 던진 공에 얼굴을 맞았다

올림픽 경기에 사람을 향해 뭘 던지는 놀이가 있던가

전쟁이었다가 놀이로 성형한 흉터 위에서

오자미였다가 공으로 둔갑한 창(矛)을 들고

윗물은 윗물끼리 아랫물은 아랫물끼리

왼 손과 오른 손이 서로 찌르고 서로 피 흘리는

아무도 의심치 않는 슬픈 유산(遺産)이여

다음 세대에는 제발 유산(流産) 되길 바라는

이다지도 밑 빠진 기원이여

     

딱지치기

어린 시절 우리는 딱지치기 놀이에 열광했었다

사각의 뿔을 세워 서로의 가슴팍을 떠밀고

더 두꺼운 종이를 찾아 달력과 백과사전을 거덜 내면서

상대를 뒤집으려 기를 썼다

대화의 기술도 타협의 기술도 창조되기 이전의 세계였다

교과서에도 없던 기술들을 졸업 후 비싼 값에 ‘야매’로 배웠다

비인기 종목이 된 그 놀이를

박물관에서 소환하여 재활용 한다는 소문이

높은 단상에서부터 무성하더니

만 바꾸려는 어른들의 딱지치기는 과거지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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