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 서린 도읍지

by 금낭아


송악은 산세가 안으로 싸안는 형상이라 권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많고, 한성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아 장자가 경시되고 아우들이 중시된다. 『용재총화』


일찍이 도선은 송악의 산천을 돌아보고 도읍을 정하면 팔백 년은 누릴 것이라 하였다.

왕건이 송악에 고려를 세웠을 때 한 술사가 말했다.

“천안 지역은 삼국의 중심지로서, 오룡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이니 여기에 대관(大官)을 설치해 관장하면 후백제가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하여 930년 태조 13년에 천안에 도독을 설치하고 제궁을 천안도독부사로 임명하였다. 과연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여 후백제 정벌을 청하였다. 왕건은 936년 왕무와 박술희에게 군사를 내어주어 천안부로 보냈다. 그리고 왕건이 직접 삼군을 이끌고 천안부로 합세하여 일선군에서 신검을 공략하였다.

그런데 진방(辰方-동남쪽)에서 뜬구름이 걷혀오더니 북한산군의 삼각산을 또렷이 비춰 보이는 것을 본 술사가 깜짝 놀랐다.

“사백 년 후에는 왕기가 저곳으로 옮아가겠구나.”

하여 한성의 왕기를 막기 위해 돌로 일흔다섯 마리의 개를 깎아 진방을 향해 짖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고려의 도읍으로서 개경에 고려의 기운을 집중하고 있을 때 슬슬 남경(南京-한양)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1096년 숙종 1년 8월에 김위제가 남경으로 천도하기를 청하였다.

“『도선기』에서 말하기를, ‘고려 땅에는 삼경(三京)이 있어 송악의 중경·목멱(서울 남산)의 남경·평양의 서경이 있으니, 번갈아 머물면 36국이 천자를 알현할 것이다. 그리고 160년 후에 목멱에 도읍을 정할 것이다.’ 하였으니 목멱 북쪽에 임시궁을 건립하시어 때마다 순행하여 왕기를 누르십시오.”

하여 숙종은 최사추와 윤관 등을 시켜 작업하도록 하였다. 최사추와 윤관이 보고하기를,

“삼각산 백악의 남쪽이 도선비기에 맞으니 중심 대맥에 따라 임좌병항으로 궁전을 지어야 합니다.”

하여 1101년에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남경 조영공사를 진행하여 1104년에 궁궐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고려왕의 남경 행차가 연례로 시행 되었다. 그리고 남경에 행차 할 수 없을 때는 남경의 임시 궁궐에 왕의 옷을 봉안하여 왕기를 눌러두었다.


하지만 목멱의 왕기가 슬슬 일어서고 있었다.

무신 이의방은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죽임을 당하자 이의방의 동생 이린은 전주로 낙향한다. 이린은 이성계의 6대조가 된다.

그 손자 이안사가 관기를 빼돌렸다가 처벌을 피해 이씨들을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하필 삼척에 새로 부임한 안렴사가 전주에서 다툼이 있던 관직자였다. 이안사는 다시 문중을 이끌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로 이주하였다.

삼척민들도 따라가자 고려 조정은 이안사를 회유하기 위해 의주(宜州-덕원) 병마직을 주어 방위를 맡겼다. 그러나 원나라 장수 산실이 이안사를 회유하여 원나라로 망명하게 했고 알동(한·중·러 접경지) 지역의 다루가치(천호)로 임명했다. 그리고 아들 이행리가 다루가치 직을 물려받았다.

그 아들 이춘이 또 다루가치 직을 계승했는데, 이춘은 아내 박씨에게서 이자흥과 이자춘을 낳았다. 박씨가 사망하자 이춘은 쌍성총관 조휘의 손녀와 재혼 하였다. 조휘는 고려 관리 신집평 등을 죽이고 원나라로 도망쳐 원나라 쌍성총관이 된 자였다.

이춘의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나는 백룡으로 흑룡이 나타나 내 거처를 뺏으려 하니 활로 쏘라.” 하였다. 이춘이 그 날짜에 연못에 가니 흑룡과 백룡이 뒤엉켜 싸우고 있어, 흑룡을 쏘아 맞추니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이춘의 꿈에 백룡이 나타나 말했다. “앞으로 공의 자손에게 큰 경사가 있을 것이오.”

이춘은 아들 이자춘에게 말했다.

“흑룡이 죽었으니 북쪽의 기운은 쇠할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가라.”

마침 고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략하기 위해 유이민의 세력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하여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를 데리고 고려에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자춘은 유인우를 도와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사복경과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평장사 등의 관직을 받았다.


1361년 공민왕 때, 이성계는 부친 이자춘의 묏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한 나무꾼이 두 승려의 대화를 듣고 기이하게 여겨 이성계에게 전해 주었다. 이성계가 뒤따라가 두 승려를 모셔와 정성껏 대접하였다.

“두 분께서 명당자리를 말씀 하셨다던데, 마침 제 부친을 모실 곳을 찾고 있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니 젊은 승려가 나섰다.

“장상이 나는 곳과 왕이 나는 곳 중 어느 곳을 원하시오?”

“왕이 나는 곳을 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나이 많은 승려가 화를 내며 일어섰다.

“원나라에서 귀화한 지 5년 된 장수가 욕심이 과하구먼.”

“최상을 선택해야 차상 정도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

이성계의 당당한 대답이 마음에 든 젊은 승려가 왕이 나는 곳을 귀띔해 주었다.

“천기를 얻더라도 인간의 노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지요.”

하며 떠나갔다.

“젊은 스님의 이름이 무엇이오?”

“속세의 이름은 없고 그저 무학이라 하오.”

이성계는 그제야 나이 든 승려가 바로 나옹선사라는 것을 알았다. 나옹선사라면 원나라 연경에서 지공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오대산 상두암에서 은둔하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신광사에 머물며 설법을 펼치는 대선사가 아니던가?

이성계는 그곳에 부친의 묘를 쓰고, 부친의 벼슬인 금오위 상장군 직과 동북 면상 만호 직을 이어받았다. 그해 10월에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고, 홍건적의 침입에 활약을 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검봉산 암자의 토굴에 무학 승려가 수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무학은 나옹선사에게서 천기를 누설한 일로 꾸지람을 들은 터라 이성계의 방문이 불편했다.

이성계는 제 온 뜻을 숨기고 돌려 말하였다.

“그저 나라를 걱정하는 장수의 근심으로 온 것뿐입니다. 근자에 자꾸 흉몽을 꾸는 것이 나라의 큰 변고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무학은 찾아온 손을 박대하지 못하여 응대하여 물었다.

“어떤 흉몽이기에 그러시오.”

“꿈에 개경의 일만 닭이 일시에 울어 큰 집이 무너집니다. 제가 급히 들어가 붙잡으려다 실패하여 서까래 세 개만 겨우 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큰 바람이 불어 개경의 온갖 꽃들이 흩날리고 거울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뭡니까?”

무학이 눈을 감고 있으니 스승인 나옹선사의 꾸지람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천기를 누설할 작정이냐?’

‘고려의 명운은 이미 다 했음을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무학대사는 눈을 뜨고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북두칠성의 기운이 모여들고 있는 이 사내를 어찌 못 본 척한다는 말인가?

“쓰러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온 것은 王자의 형상이요, 꽃이 떨어졌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고, 거울이 떨어지면 응당 소리가 나겠지요.”

이성계는 무학 선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사가 내 뜻을 알아주는구려.”

“좋은 징조가 있으니 절을 짓고 수륙대제를 열어 전국의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이성계는 그곳에 절을 지어 석왕사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북두칠성에 제사를 올렸다.

제사 다음날 한 사내가 찾아와 긴히 전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이 사람이 고개를 넘다가 고목 구멍에서 밤을 지내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습니다. ‘이보게, 석왕사에서 북두칠성께 제사를 올리는데 가서 음복하세.’ 하니 그 고목이 대답하기를, ‘집에 나그네가 들어있어 못 가네.’ 하니 그 사내가 떠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고목이 묻기를, ‘제사는 어땠나?’ ‘제사음식이 정결하지 못해 칠성신들이 그냥 가셨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아 이곳에 오니 간밤에 제사가 있었다 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고맙네. 내 다시 제사를 올릴 터이니 사흘 후에 다시 그 고목에 들어가 있어 보게.”

이성계는 다시 음식을 장만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다음날 그 사내가 와서 전하였다.

“이번에는 그 목신이 배부르게 음복하였다면서 칠성신들도 흡족해하며 떠났다고 합니다.”

“다른 말은 없었나?”

이성계가 물으니 사내가 주위를 살피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목신의 말이 칠성신들이 흡족해하면서 ‘제사장에게 삼한을 주는 게 어떨까’ 하고 의논을 하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성계의 꿈에 북두칠성의 신이 내려와 금척을 주었다.

“경복흥(공민왕 때의 재상)은 맑은 덕을 지녔지만 너무 연로하고, 최영은 정직하지만 지나치게 우직하다. 이성계 너는 문무의 자질을 갖추었고 덕망과 학식이 있고 백성의 신망이 두터우니 이 금척을 준다.”

하지만 꿈에서 받은 금척은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정도전의 『삼봉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떤 사람이 지리산 석벽에 있던 이서를 가져와 바쳤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돼지를 탄 나무아들의 칼과 주초의 문필과 비의의 지혜로 삼한을 다시 세운다. (이성계가 돼지띠이고, 나무아들 木子를 합치면 李씨가 되고, 주초走肖는 합치면 鄭씨 정도전이고, 비의非衣는 합치면 裵씨 배극렴이 된다)

그리고 『동각잡기』에는 ‘이성계가 개국하기 1년 전에 덕원부(함경도)의 말라죽은 큰 나무에서 다시 잎이 나 살아 붙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덕원부는 이성계의 고조부가 전주에서 삼척 거쳐 함경도로 옮겨 정착한 곳이다.

이렇게 이성계는 역성혁명의 명분을 조성하여 두었다.


어느 도승이 충청도 청계산을 지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하늘에서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더니 그 중 한 마리가 여의주를 차지했는지 모습이 사라지더니 날이 다시 개었다.

도인이 지형을 살펴보니 비룡상천형의 명당이라 절을 지었다.

1392년 태조 1년에 보각국사가 혼수(混修)가 이곳에서 입적하자 태조가 대규모 가람으로 중창하여 청룡의 기운을 눌렀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개경에서 지내다가 새 도읍지를 물색하였다.

권중화가 왕실의 태(胎)를 봉안할 곳을 찾으러 다니다 돌아와서 계룡산을 추천한 일이 있었다.

1393년 2월에 이성계가 계룡산을 직접 살펴보고 궁궐터를 다지다가 정도전과 하륜의 반대로 2개월 만에 중단됐다.

“계룡산은 나라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강이 멀고, 동북쪽과 막혀 있어 도읍지로 적절치 않습니다.”

이성계는 새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해 무학을 찾으라 명했다.

경기·해서·관서 세 지방의 방백(각 도의 최고 관리)들이 직접 전국 산천을 뒤지며 찾다가 한 지점에서 만났다. 곡산 고달산에 한 고승이 암자를 짓고 산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것이었다. 세 방백은 함께 암자로 들어가자고 합의하고 거느린 종자들을 산 아래 대기시켜 놓았다. 암자 아래에서 평복으로 갈아입고 암자에 들어서니 노승은 이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저 삼인봉(三印峰)이 유난히 빛이 나더이다.”

세 방백은 암자 아래 소나무에 방백의 인장(印章)을 걸어두었던 것을 떠올렸다.

“드디어 무학스님을 만났습니다.”

이성계는 무학을 불러 정도 문제를 의논하였다.

“도선 선사는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지만, 궁궐을 지을 장소를 정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하륜은 모악 남쪽을 주장했고, 일관 이양달은 화악 남쪽을 추천하였다. 또는 삼각산 서쪽 연서역 지역이 좋다 하여 살펴보니 바깥 산들이 모두 서로 등지고 뻗어 있어 포기해야 했다.

무학이 왕십리의 터를 둘러보고 있으니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갔다.

“이 놈의 소가 어리석기가 무학 같구나. 바른길을 두고 굽은 길로 가려느냐?”

하고 소를 나무라니 무학이 달려가 붙들었다.

“나옹 스승님 아니십니까? 바른길을 일러 주십시오.”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 보아라.”

하여 무학은 인왕산 아래를 추천하였다.

“인왕산 아래 동향으로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아 궁궐을 지으면 관악산의 화기를 피할 수 있고 대대로 안온할 것입니다.”

그러자 정도전이 반박하였다.

“안온하기는 하겠지만 음침하여 나라가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예부터 제왕은 모두 정남쪽을 향하는 법이니, 동향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삼각산 아래 남향으로 궁궐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자 무학이 말했다.

“신라 때 의명 대사가 이르기를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정씨가 시비를 하면 5대를 지나 왕위 찬탈 문제가 생기고, 이백년 뒤에는 나라가 온통 짓밟히는 난리가 있을 것이라 했소.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백년 후에 내 말이 생각 날 것이오.”

하지만 이성계는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해 종묘와 사직·궁궐·관청 등의 위치를 정하게 했다.

1394년 10월에 이성계가 한양으로 옮겨가 한양부 객사에 임시로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한양 건설이 시작되었다.

인왕산 서쪽 기슭에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선바위라고 불렸다.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이 바위를 성 안으로 넣을지 의견을 달리했다. 이성계의 꿈에 눈이 오더니 선바위 안쪽의 눈만 녹는 것을 보고 (음기를 띤) 선바위를 성 밖에 두게 하였다. 그래서 한양도성(서울성곽)을 설성(雪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무학대사의 의견을 반영해 궁궐의 화기를 막기 위해 정문에 돌로 만든 해치상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동으로 만든 용을 넣어 두었다.

1395년 10월에 이성계가 경복궁에 들어갔다.

태조 4년에 백악을 진국백,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여 제사를 지내고 일반인의 제사를 금하였다. 다음 해에 삼청동에 도교제사를 지내는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했다. 그리고 북두칠성에게 제사 지내는 태일전을 소격전에 합하였다.


무학대사가 말 한, 온 나라가 짓밟힐 것이라던 이백년 후인 신묘년 1491년에 조선은 왜란의 조짐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신묘년 겨울에 임진왜란의 조짐이 보이자 박동량이 걱정을 하였다.

“이제 나라의 운명은 가망이 없는가?”

하니 심우승이 대꾸하였다.

“걱정 마라. 나라의 중흥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홍종록의 어린 아들이 글자를 모르는데도 꿈속에서 이런 시를 얻었다고 한다. ‘가랑비 머금은 하늘에 버들 빛 푸르고 동풍이 불어오니 말발굽 가볍구나. 태평세월 명관들이 조정으로 돌아오고 승리를 알리는 환성들이 한양에 가득하네.’”

또 신묘년 겨울에 유성룡이 꿈을 꾸니 경복궁 연추문에 불이 나서 다 타고 유성룡이 서성거리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궁궐은 지대가 낮아 다시 지을 때는 조금 높여 인근 산 높이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과연 다음해에 임진전쟁이 터지고 궁궐이 불에 타자 사람들은 나라가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고 여겼다.

유성룡이 이 꿈 얘기를 하며 “꿈속에서 궁궐을 다시 건축할 논의가 있던 것을 보면 반드시 적병이 물러가고 임금이 환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오산설림·순오지·고려사·고려사절요·연려실기술·오산설림초고·지봉유설·용비어천가·기재사초·풍암집화·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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