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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May 26. 2023

<<고려사>>에 형제투금 설화가 수록된 까닭



고려 공민왕 때.

당시 어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동생이 황금 두 덩이를 주워 하나를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던 중에 동생이 갑자기 금덩어리를 물에 던져버렸다.

형이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묻자 답하기를,

“제가 평소 형님을 깊이 사랑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고 보니 문득 형을 꺼려하는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따라서 이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인지라 강에 던져버리고 깨끗이 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니, 형도 말하기를,

“너의 말이 정말 옳다.”라고 하면서 역시 금을 물에 던져버렸다.

그때 배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모두 우매한 민(民)인지라 두 사람의 이름과 마을을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


지식백과에 의하면

‘<<고려사>>는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정인지·이선제 등이 왕명으로 쓴 관찬사서로, 조선 건국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전 왕조인 고려의 폐정을 권계하고 교훈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객관적인 서술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태조실록>>에 보니 이행(李行)을 치죄한 내용이 있다.

이행이 고려 사관 때 쓴 사초에

‘이성계가 우왕·창왕·변안열을 죽였다’고 쓴 내용을 문제 삼았다.

이에 이성계는 화를 냈다.

“변안열은 대성(臺省 - 대간과 중서문하성)에서 죄주기를 청하여 공양왕이 목 베기를 허가했고, 우와 창 부자는 백관과 백성이 한 목소리로 목 베기를 청하여 공양왕이 윤허했으니, 나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건만 작은 선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고 이행에게 장(杖) 1백 대를 치고, 가산을 적몰하고 울진으로 귀양 보냈다. (후에 해배되고 관직에도 오름)


이행 만 사초의 내용때문에 치죄된 이유는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태종 14년 5월 10일 영춘추관사 하윤을 불러 <<고려사>>를 다시 찬정하게 하다.

....

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전조실록을 수찬할 때 여러 사관이 모두 사초를 고쳐 써서 바쳤으나, 오로지 이행(李行)만은 그렇게 하지 않아 수금(囚禁)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 기록으로 <<고려사>> 편찬 사료의 객관성은 의심의 여지가 있겠다.


그리고 김종서·정인지 등이 ‘형제투금’이라는 설화를 역사서에 기록한 연유를 추정해보니,

고려 마지왕 왕 공양왕과 그 형 왕우를 조롱한 내용인 듯하다.


형제는 황금을 버릴 만큼 우애를 중요시해야 하는데, 공양왕은 허수아비 왕위를 받고 형에게까지 관직을 주었으니 형제가 망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때 배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모두 우매한 민(民)인지라 두 사람의 이름과 마을을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는 구절은 고려 신하들이 우매하여 고려왕조가 멸했다고 비꼰  듯하다.


공양왕이 삼척에서 살해당했지만, 형인 왕우는 이방번과 사돈지간이라 겨우 화를 면하고 조선에서 힘겨운 곁방살이를 했다.

태조는 왕우를 귀의군(歸義君)에 봉하여 왕씨 제사를 맡게 하였다. 하지만 두 아들 왕조와 왕관에게는 외가의 성씨인 노씨로 바꾸게 하였다. (이름이 왕조와 왕관이니 태조의 입장에서 꺼림직 할만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신하들이 왕씨들을 모두 죽이자고 지속적으로 건의했지만 태조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394년에 조정에서는 왕씨를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무리가 있다며 추국을 벌였다.

그래서 연루된 왕씨들을 유배 보내고 다른 왕씨들은 섬으로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근근이 왕씨의 제사를 맡고있던 왕우가 사망하자, 태조는 왕우의 두 아들을 왕씨로 복귀시키고 왕씨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리고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 왕우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왕건의 조모 저민의는 서해용왕의 딸인데, 침실의 창 밖에 우물을 파고 서해의 용궁(龍宮)을 오갔는데......

 하루는 작제건이 몰래 엿보았더니 용녀는 어린 딸과 더불어 우물에 들어가 함께 황룡으로 변해 오색구름을 일으켰다.......

용녀가 돌아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신의를 지킴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제 이미 다짐을 저버렸으니 저는 여기에 살 수 없습니다."

하고 어린 딸을 데리고 용으로 변해 우물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려사>>


이성계의 조부 이춘은 원나라에 있을 때 백룡을 도와주었더니 백룡이 꿈에 나타났다고 했다. <<용비어천가>>


왕우의 사위 박석명은 젊은 시절 이방원과 친구였다.

이방원과 한 방에서 자다가 박석명이 꿈을 꾸니 옆에 용이 누워있었다. <<용재총화>>


이방원이 왕이 되기 전 여종 김씨(후에 후궁)가 새벽에 보니, 이방원이 자는 침실 위에 백룡이 나타나 머리를 이방원 쪽으로 향하고 있더라....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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