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배 사위 조운흘

by 금낭아


고려 말에, 조운흘은 시대가 어려워질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 했다. 서해도 관찰사 때는 ‘아미타불’을 외며 다녔다. 그것을 본 친구가 ‘조운흘’을 외우고 다니며 “조운흘이 부처가 되려고 ‘아미타불’을 외우듯이 나는 조운흘처럼 관찰사가 되려고 그런다.”고 말했다.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조운흘은 맹인이 되었다며 사직하고 낙향했다.

조운흘의 첩이 조운흘 아들과 정을 통하였는데 모르는 척 하고 있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그는 눈병이 나았다며 첩을 뱃놀이에 데려가 빠뜨려 죽였다. 『용재총화』


조운흘(趙云仡)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고려 충신 김득배의 사위였다.

김득배는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개경이 홍건적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총병관 정세운의 수하로서 개경을 수복하였다.

그런데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이 정세운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공민왕의 가짜 편지를 보내 정세운 장군을 시해하게 하였다.

벗인 안우와 이방실이 편지에 속아 정세운을 살해하려 하는 것을 김득배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김용의 계략에 속아 정세운을 살해한 안우와 이방실이 처형되고 김득배는 도주했다.

김득배의 동생 김득제가 화산에 유배되고, 김득배의 처자가 옥에 갇혀 문초를 받았다.


이때 김득배의 사위였던 직강 조운흘이 장모를 설득했다. “숨은 곳을 고하여 고초를 겪지 마십시오.”

조운흘은 형부원외랑으로서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의 몽진을 호종하여 2등 공신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모는 한동안 고문을 참아냈다.

조운흘이 재차 설득했다.

“따님은 살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차마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김득배의 아내는 결국 김득배가 상양현에 숨어있다고 말하고 말았다.

김득배는 김유·박춘·정지상 등에 의해 붙잡혀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이때 김득배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사위가 아니라 직한림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김득배가 주관했던 과거시험의 문생이었다. 고려 때는 과거 주관자를 은문(恩門), 급제자는 문생(門生)이라고 하여 스승과 제자의 예가 각별했다.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김득배의 시신을 수습 할 수 있게 허락을 받아 장사 지내며 제문을 지었다.

“아아, 황천이시여! 내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복선화음(福善禍淫)이란 하늘이 하는 일이요 상선벌악(賞善罰惡)이란 사람이 하는 일이라 들었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옛 사람의 말씀에 ‘하늘은 승자를 정해놓으나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기리라’ 하였는데, 이는 어떤 이치이나이까?......”

그런데 이 제문은 훗날 정몽주 자신에게 적용되고 말았다.

이방원에게 피살 된 정몽주의 시신을 아무도 수습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우현보가 수습하였다고 한다.


조운흘은 이 공으로 국자직강에 제수되고 전라도·서해도·양광도 3도의 안렴사를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던 1374년 공민왕 23년 전법총랑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 아래에 은거하여 미친 척 하며 소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3년 후 우왕 때 다시 기용되었다가 시절이 불안하여 퇴직했다가 창왕 때 다시 관직에 올라 서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공양왕 2년 1390년에 계림부윤이 되고, 조선이 건국되자 강릉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태종 4년에 사망하여 『실록』에 그의 졸기가 기록되었는데, 덕망과 고고함이 있다 찬하였고, 『용재총화』에서는 조운흘의 뒷담화를 해놓은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왕기 서린 도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