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폭탄 제거반 이황과 김인후

by 금낭아

이황

서소문 안에 이황이 살던 집이 있었는데 한 관상감이 빌려 거처하고 있었다. 정원에 푸르고 왕성한 전나무가 있었는데, 1611년 경상도 사람이 이황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바람에 전나무 중동이 부러졌다. 『장빈거사호기』


1611년의 일을 찾아보니, 광해 3년 3월 26일에 정인홍이 올린 상소가 있었다.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

일찍이 이황이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자와 장자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 했었는데,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스승을 변호한다는 핑계로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한 것이다.

이에 사관이 사견을 덧붙여놓았다. ‘정인홍은 사람됨이 편협하고 사나우며 식견이 밝지 못해 방자하게 함부로 말을 지어내고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세상 현인군자가 그의 비방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일찍이 성혼과 이이를 비방하더니....... 정인홍 같은 자는 사문의 쓸데없는 가라지이고 사림(士林)을 해치는 좀도둑이다’

『광해군일기』


존경과 비판을 받은 이황은 안동의 온계리 출생으로 모친의 꿈에 공자가 대문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시화휘집』

이황의 외조부 박치는 춘천 박씨로 함창의 부자였다. 어느 눈바람 치는 밤에 나병 걸린 여자 걸인이 재워달라고 하였다. 하인들이 쫓아내려는 것을 박치가 방 윗목에 재웠다. 여자 걸인이 발이 시렵다며 박치의 이불 속에 넣으니 박치는 화내지 않고 손으로 들어냈다. 아침에 걸인이 사라졌더니 며칠 후에 또 재워달라며 들어와 이불 속에 발을 넣었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 선녀의 모습으로 나타나 “뜰에 초당을 지어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하였다가 같은 성씨의 여인이 해산 할 때만 그 방에서 해산하게 하시오.” 하며 떠나갔다.

박치가 시키는 대로 초당을 지어놓았다가 며느리들이 해산 할 때 들여보냈지만 통증이 더 심하다며 다른 방에서 해산했다. 박치는 그 방이 아무 효험이 없다며 닫아두었다.

얼마 후 안동으로 시집 간 딸이 해산 하려고 와서 진통을 견디다 못 해, 옛날에 지은 초당에 들어가 보고 싶다 하였다. 박치는 그제야 같은 성씨의 여자가 해산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딸이 그 방에 들어가니 진통이 가라앉으며 순산 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이황이다. 『청구야담』


이황이 20세 때 권질이 불렀다.

권질의 부친 권주는 성종 때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승정원 주서였다. 연산군 때 경상감사로 재직 중에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고 모친은 관노가 되었다. 권질도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해배되었고, 신사무옥 때 아우 권전이 장살되면서 권질도 연좌되어 예안으로 유배 가게 된 것이었다.

권질은 평소 이황의 사람됨을 눈여겨보아 자신의 딸을 의탁하였다.

“딸이 어렸을 때 집안의 모진 일을 겪어 정신이 혼미하여 아무도 색시로 데려 가지를 않네. 부디 이 죄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나.”

오랫동안 침묵하던 이황은 예를 표하고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혼례를 갖출 테니 염려 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모친의 허락이 나지 않았는지, 김해 허씨가 첫 부인이 되어 1523년에 첫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허씨 부인이 1528년에 둘째아들을 낳고 한 달 후에 죽고 만다.

아내에 대한 상례가 끝난 1530년에 이황은 권질의 딸 권씨를 둘째부인으로 들였다. 권질과 약속한 9년 후에야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황은 전 부인 허씨의 홀로 된 모친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처가의 대소사를 평생토록 챙겼다.

권씨 부인과는 16년을 함께 살았는데, 부인의 실성한 행동 때문에 난처한 일이 많았지만 이황이 다 덮어주고 막아주었다고 한다. 권씨 부인은 40세가 넘은 나이에 임신하여 해산하다가 사망하였다.

이황은 권씨 부인의 무덤 근처에 암자를 짓고 1년 간 애도하고, 두 아들은 권씨를 친모처럼 대우하여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애도가 끝난 이황은 재혼하지 않고 첩을 들여 아들을 낳고 살았다. 첩이 먼저 죽자 첩의 아들 이적을 호적에 올리고 아들들에게 적서의 차별을 두지 못 하게 하였다. (『위키백과』에서 퇴계학부산연구원의 《퇴계학논총 제26집》 인용한 것을 참고함)

그리고 기녀 두향을 첩으로 들였는데, 이황이 먼저 죽자 두향은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이황과 조식의 인간적인 한담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황이 말하기를 “술과 여자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데, 나는 술은 참을 수가 있지만 여색은 가장 참기 어렵더군. 그래도 중년 이후에는 조금 참을 수가 있어 다행이야. 자네는 어떤가?” 하니,

조식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나는 여색에 있어서 이미 패전장수이니 묻지 말게.”

제자 송익필이 듣더니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옥잔의 좋은 술은 그림자가 없지만, 미인의 흰 살결엔 흔적이 남으니, 즐거움을 누릴 땐 경계함을 알아야 하니, 부디 흔적을 남기지 마소서.”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이 최고의 학자 세 명을 등장 시켜, 선비들이 체면 때문에 차마 하지 못 한 말을 대신 하려는 의도로 쓴 것인지....)



김인후

양재역 벽서사건 때 유희춘이 귀양 가게 되자 김인후가 유희춘의 아들을 사위로 삼아 거두겠다고 말했다.

유희춘의 아들 유경렴은 재주가 없고 나이도 자기 딸과 맞지 않았지만 김인후가 사위로 삼은 것이다. 『동각잡기』

사위 유경렴은 겨우 찰방(역참관리)을 지냈다. 유희춘은 20년 후 선조 즉위 때 석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고 사직하여 낙향하였다.

김인후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동에서 태어났다. 마을 입구에 붓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김인후가 태어났다고 전한다.

붓바위에 얽힌 설화가 있는데, 백여우 한 마리가 김도령을 사모하여 인간이 되고자 붓바위에 빌었다. 붓바위 신령이 여우를 밤에만 인간이 되게 해 주어 김도령을 보필하였다. 여우는 낮에 제 꼬리털을 뽑아 밤에는 붓을 만들었다. 과거보러 가는 김도령에게 그 영험한 붓을 주며 장원급제를 기원하였다. 이를 시기한 이도령이 과거장에 들어가기 전에 김도령의 붓털을 잘라 버렸다. 그것도 모르는 김도령은 붓이 없어 답지를 작성하지 못했다. 김도령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던 백여우는 바위를 핥으며 울다가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붓바위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김인후는 다섯 살에 천자문을 눈으로 보기만 하고도 모두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여섯 살에 시를 짓고, 여덟 살에는 전라도 관찰사로 온 조광조의 숙부 조원기가 그 재주를 보고 ‘장성신동 천하문장’이라 칭찬 했다. 아홉 살 때는 기준이 재능을 시험해 보고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며 붓 한 자루를 선물로 주어 김인후는 그 붓을 보배로 삼았다. 열 살 때는 관찰사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나의 소우(小友)’라며 칭찬했다.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이황과 학문적으로 잘 통하여 유일한 벗으로 토론하며 친교 하였다. 홍문관 대제학 이행(李荇)이 김인후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시험해 보니 즉석에서 지은 시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예조에서는 시를 잘 짓는 명나라 사신이 온다 하여 여러 제술관을 뽑아놓고도 유생 김인후를 상비군으로 차출했을 정도였다.

김인후는 성균관에 있을 때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애도하고, 기일에는 치제(致齋-제사 지내기 위해 심신을 깨끗이 하여 정성을 모음)를 올렸다. 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머리에 삼끈을 두르고 애도 글 ‘만사’를 짓고 기일에 치제를 올렸다.

김인후는 기준의 예견대로 세자(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예로써 공경하고, 김인후는 세자의 덕에 감명을 받아 밤늦은 시간까지 토론 하곤 하였다. 세자는 시와 그림에 능하였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김인후에게는 손수 그린 <묵죽> 을 하사하였다.

인종-묵죽.jpg


이에 김인후가 시를 지어 답했다.

뿌리 가지 잎새 마디 모두 맑고 깨끗하고

굳은 돌은 벗인 양 범위 안에 들어 있네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지으시니

천지와 함께 어울림이 어김이 없으시네


김인후는 기묘사화 때 죽은 신하들의 신원 복원을 주장하다가 반대에 부딪치자 부모봉양의 이유를 들어 사직을 청했다. 중종은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에 제수하였다.

후에 인종이 자주 환후가 있자 김인후는 약 제조 논의에 참여하겠다고 청하였다가 거부당하였다.

인종의 부음을 듣자 목을 놓아 통곡하다가 심장병이 발작했다. 병으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술과 시로 울분을 달랬다. 매년 인종 기일 즈음에는 문 밖에 나오지 않다가 기일에 술을 들고 산에 들어가 밤새 곡을 하고 내려왔다.

명종이 여러 번 관직에 불렀지만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신흠이 쓴 『상촌집』에는 김인후가 죽어 염라왕이 되었다고 써 놓았다. 김인후가 죽은 후에 이웃에 사는 오세억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숨이 끊어진 지 반나절 만에 깨어났다. “내가 죽어서 천제가 있는 자미궁이란 곳에 갔더니, 그곳에 하서(김인후) 어른이 자미선으로 있더구먼. 하서 어른이 명부를 보더니 내가 수명이 다 하지 않은데 잘못 왔다며 일흔 일곱 살에 보자고 하면서 돌아가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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