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과 이기
- 생육신 성담수·성담년의 외조카이며, 사육신 성삼문의 7촌 외조카다. 이율곡도 이들 형제의 먼 조카가 된다.
아우 이행(李荇) - 그의 부친 이의무는 김종직의 제자이고, 이행은 김종직의 제자 최부에게서 공부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소세양·정사룡·이희보 등이 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정광필의 추천을 받기도 하였다.
연산군 초에 응교였던 이행은 폐비 윤씨의 추숭을 반대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저장했다가 갑자사화 때 곤장을 맞고 충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석방되고 교리로 등용되어 다음해에 중종 책봉주청사의 기록 담담인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간·성균관사성·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러 조광조 일파와 갈등하다가 사직했다. 남곤과 함께 조광조 등의 사림에게 배척당했지만 기묘사화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부제학으로 기용된 뒤 여러 요직을 거쳐 대제학까지 오른다. 남곤 등과 함께 기존 동국여지승람을 수정·보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정리하였다. 김안로를 탄핵하다가 1531년 중추부판사로 좌천되었다가 함경도 함종으로 유배 되어 병사한다.
형 이기(李芑) - 장인인 군수 김진이 장리(뇌물을 받거나 재산을 횡령한 벼슬아치)로 처벌받았기 때문에 이기는 연좌되어 삼사(三司)와 청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종사관·종성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다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이언적이 추천해주었다.
이기는 젊었을 때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했지만 형 이권의 그늘에 가려졌다고 불만했다. 글 솜씨는 아우 이행에 가려졌고 장인은 앞길을 막는 존재였다. 그는 허통(금고를 풀어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제도)을 받기 위해 누이의 손자인 한경록(중종 부마)과 은밀히 결탁하여 줄을 댔다.
『중종실록』에 장리의 후손과 장리의 사위 임용에 대한 논의 기록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결국 수상 윤은보가 주선하여 ‘장리의 사위는 현직에 서용하지 않는다.’는 법을 깨고 이기에게 허통을 받아주었다. 그가 허통 되었다는 서찰을 궐내의 별감이 잘못 전달하여 이기의 고종사촌 유인숙에게 전달되었다. 그동안 이기가 여러 곳에 줄을 댄 것이 소문나자 이기는 유인숙을 미워하게 되었다.
이기는 예조참판·한성부판윤을 역임하다가 김안로 등의 탄핵을 받아 강진에 유배되었다. 김안로 사망 후에 복권되어 승승장구하여 병조판서로 추천되었을 때 유관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1541년 순변사에 도원수를 겸임하여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중종이 병조판서로 임명하려 하니 유관과 유인숙이 장리의 사위라며 반대하였다. 인종 때는 인종의 숙부 윤임 등 대윤의 탄핵으로 판중추부사로 강등되었다.
이들에게 앙심을 품은 이기는 윤원형의 밑으로 들어간다. 이에 이기의 능력을 천거했던 이언적은 이기가 음험하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기는 윤원로에게 예전에 이언적이 ‘문정왕후가 동궁을 핍박하니 걱정이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윤원로는 이언적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인종이 사망하자 이기는 윤임과 유관과 유인숙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정순붕·허자·임백령 등과 함께 윤임 일파를 역모로 무고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다 죽여 버린다. 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남은 사림파를 제거한다. 이때 이언적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귀양 가게 된다. 이기는 자신의 허통을 위해 애써준 이언적에게 사형은 면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피맛을 본 이기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제거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처벌 상소가 여러 번 올려 졌으나 명종은 듣지 않았다. 명종 2년에 이기는 이황·이천계·권물·이담·정황 등을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이행의 아들 이원록이 ‘숙부가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내가 이 사람들의 무고함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며 눈물로 만류했다. 그래서 이기는 공론이 찬성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 명종에게 이황은 죄가 없다며 아뢰며 대죄를 청하니 명종은 대죄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기는 양사를 조종하여 조카 이원록을 탄핵하게 한다. 1549년 명종 4년에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 병조 정랑 이원록은 전일 역류들을 죄줄 때(을사사화) 자못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으며, 또 그의 숙부 이기를 지목하여 멸족의 화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음험하니 찬축하소서.” 하니 명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장 일백 대를 치고 극변안치(유배) 하게 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이기를 건드리지 못 했다. 명종 5년에 조강에 들었다가 중풍으로 쓰러졌는데도 명종은 이기를 계속 관직에 머물게 하여 영의정까지 올린다. 이기의 거동이 불편해지자 명종은 중추부영사로 전직시키고 풍성 부원군에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하게 하는 등, 명종은 이기를 놓지 않았다. 1552년 4월 28일 갑자기 병세가 위중하더니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명종은 3일간 정사를 파할 정도로 애석해 했다.
선조 즉위 후 을사사화가 날조로 밝혀지면서 훈신들의 훈작이 삭제되었다. 당시에 윤원형·심통원·이기를 3흉(凶)이라 하고, 정순붕·임백령·정언각을 3간(奸)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억령 형제 - 일찍 부친을 여의고 박상 형제에게 글을 배웠다. 박상은 형 임억령에게는 문장을 이룰 것이라 하고, 아우 임백령에게는 관각의 문장을 잘 지을 것이라 칭찬했다.
임억령은 중종 때 급제하여 부교리·사헌부 지평·홍문관 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으로 일했다. 명종 즉위년에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아우 임백령이 대윤 제거를 모의하면서 임억령에게 알리고 함께 참여하기를 청하였다. 임억령이 아우를 말렸지만 임백령은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하여 임억령은 신병이 있다며 사직을 청하였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형을 아우가 전송하니 임억령이 시를 지었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고요히 흐르고 물결 일지 마라”
임억령은 소탈하고 얽매이지 않고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당시에 평을 받았다. 임백령이 원종공신을 받았다며 녹권을 보내오자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임백령이 죽은 후에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았다.
임백령은 1519년 중종 14년에 식년 문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상서원직장에 서용되었다가 다시 예문관검열이 되니, 대간이 이의를 제기하여 임용이 취소되었다. 다음해에는 예빈시 직장으로서 외방의 서리를 함부로 구류한 일로 파직 되었다. 곧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되었다가 1524년 중종 19년 5월에 고향에 내려가 노모를 봉양하겠다고 청했다. (혹 이때가 윤임에게 옥매향을 빼앗긴 때인가?) 하여 중종이 남평 현감에 제수하였는데도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다. 그래서 중종이 영광 군수로 올려주었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불러들여 교리로 올려준다. 사헌부 교리가 되자 김극핍을 탄핵 했다. 이즈음 고향의 임백령 부친 무덤이 앙심을 품은 아전들에 의해 도굴 된다.
1537년 중종 32년에 김안로·허항·채무택이 처형되고, 문정 왕후의 형제 윤원로·윤원형이 유배 된다. 이때부터 대윤 소윤이 등장한다.
이때 호조판서 임백령은 윤임의 집 근처에 있던 집을 팔려고 했다. (윤임과 거리를 두려 한 듯하다) 이때 윤임은 동궁이 후사가 없어 불안 해 하는 상황이었다. 임백령은 윤원형 형제와 은밀히 만나기 시작했다.
인종이 서거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7월 7일에 윤인경 등이 윤원로를 탄핵했다. “윤원로가 동궁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하여 우애가 높은 형제를 이간질 하였으니, 윤원로가 자전(문정대비)의 형제이지만 두 분 선왕에 죄를 지었으니 자전께서도 개인적인 정을 둘 수 없습니다.”
윤원로에 대한 탄핵이 계속해서 올라오자 문정대비는 유배를 허락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밀지를 내려 대윤을 숙청하라는 명을 내렸다.
밀지를 받은 이기·정순붕·허자·임백령이 윤임·유관·유인숙을 외방으로 내쳐야 한다고 공론화 하니, 문정대비는 (밀지를 내린 적 없는 듯) 이들을 크게 다스리라 명했다.
이에 홍언필과 윤인경은 윤임만 유배하고 유관과 유인숙은 파직하자고 한다. 죽이지는 말자는 뜻이었다. 문정대비는 일단 수용하여 유관과 유인숙은 파직하되 윤임은 의금부 나장이 묶어 유배 보내라 했다. 윤인경과 홍언필은 윤임의 죄가 크지만 두터운 은혜로 대우하여 그냥 외방으로 내치기만 해도 된다고 청했다.
이때 임백령은 문정대비의 내심을 알아채고 ‘대비가 내간의 일이라 드러낼 수 없다는 일의 내용을 말하라’고 했다. 대비는 그 말을 하면 큰일이 일어난다며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윤임에게 더 큰 죄가 있음을 암시한다.
대비는 윤임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는데 대신들은 이정도의 처벌만 하면 된다고 수차례 아뢰니 속이 터졌다. 정순붕도 대신들이 아뢴 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니, 문정대비는 폭탄을 터뜨린다.
“일찍이 인종이 불안해 한 이유가 윤임이 우리 모자를 제거하려는 뜻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기는 만약 또 그런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역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비는 윤임의 아들 윤흥인이 무인이라 도성 안에 있으면 위험하니 함께 유배 보내라 명한다.
이때 홍문관 헌납 백인걸이 ‘대비가 밀지를 내린 것이 그르다’고 논의하자 대비는 화가 나 비망기를 내렸다.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윤임이 유관·유인숙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는데도 대간과 시종들이 한 마디 말이 없어 내가 밀지를 내린 것이다. 백인걸을 금부에 가두고 엄하게 추문하고 삼사의 관원들도 파직하라. 애초에 윤임 등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가볍기 때문에 이런 논박이 나온 것이니 윤임의 죄를 정하라. 내전에 생긴 일을 발설하지 않고 참으며 대신들의 의견을 따라 가벼운 벌을 내렸는데도 나를 공격하니 지극히 한심하다. 이렇게 되었으니 뒷날의 일을 의심 할 수밖에 없다. 홍언필과 정순붕은 처음 의논할 때는 참여했었으나 지금은 참여하지 않았으니 속히 사관을 보내라.”
이 비망기가 내려오자 아무도 말을 못 하는데 임백령이 백인걸을 죄주자고 한다. 윤인경과 홍언필은 간관을 벌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고 이언적·권벌·신광한 등도 계속해서 구원하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눈 밖에 날 뻔한 정순붕이 달려와 간관을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유관은 전하(명종)가 즉위하시던 날에 수상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하는지를 취품(여쭈어 의견을 기다리다)하려 한다.’고 하였으니 유관은 다른 사람을 세우려 한 것입니다. 또 유인숙은 윤임의 집안과 혼인을 맺어 결탁하고 전하(명종)께서 즉위하시던 날에는 대군시절 사부였던 신희복을 불러 ‘전하께서 어지신가’ 물었는데 설사 어질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하려고 물었던 것일까요?...... 두 사람의 측근들이 또 이들을 변호했으니 이 또한 흉악한 계략의 한 단서입니다........”
대비는 이 상소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신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윤인경·이기·허자는 윤임을 죽이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해 대죄를 청한다.
이렇게 유관 등은 뼈도 못 추리게 되고 신하들이 벌벌 기는데 권벌이 홀로 폭탄선언을 한다.
“정순붕의 상소를 보니 실로 미안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주상이 즉위하신 이래 뜬소문이 많았으나 신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누군가 왕대비(인종비 인성왕후)로 수렴청정을 하시도록 해야 한다고 하기에, 신은 ‘생모(문정대비)께서 계시는데 무슨 말인가.’ 했더니, 삼공(윤임 등)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또 전하께서 즉위하시던 날 전하의 영명하신 기상을 보고 영주(英主-영특한 왕)이시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경연 때는 주상의 옥음이 낭랑하고 문자를 해석할 때에는 신들보다 먼저 해석하시어 신의 기쁨은 한이 없었습니다....... 유관은 평소에 뱃병이 있어 항시 벽에 기대앉아야 했고, 유인숙 역시 상기증(담기가 뭉쳐 기관지를 막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기침한다)이 있어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저 두 늙은 서생들이 무슨 다른 생각(반역)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망령되게 아뢰니 신은 실로 죽고 또 죽을죄입니다. 장차 신을 논박하는 여론이 있을 것이니 미안하나 먼저 물러갑니다.”
하며 절하고 나갔다. (후에 권벌은 양재역 벽서 사건 때 숙청 되었다)
이후로 대신들의 입에서 윤임 등을 죽이자는 말이 나오지 않자 대비는 조용히 결정하겠다며 모두 물러가라 명한다.
그리고 명종 즉위년 8월에 근정문에서 윤임·유인숙·유관의 치죄에 대한 교서가 반포된다. 윤임·유관·유인숙에게 사사(賜死)만 명하여 은전을 베푼다는 내용이다. 즉 거열형이 아닌 사약형을 내려 시신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을사사화이다.
그리고 공신의 서열을 정하여 발표했다. 임백령은 위사공신 1등에 숭선부원군으로 책봉되고, 그 아우 임구령은 대윤 등이 회합할 때 대청 밑에 먼저 들어가 몰래 듣고 이기에게 전해 준 일로 공신3등에 녹훈 되었다.
정순붕과 그 아들들
정순붕은 1504년(연산군 10)에 급제하였는데 홍패(합격증)를 몰수당했다. 과거 때 시제가 ‘간흉을 제거하여 조정을 깨끗이 함’이었는데 제출한 문장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중종 때 주서가 되고 예조 좌랑이 되었는데 대간이 체직을 청한다. 출신이 부정하고 이력도 없고 시사에도 숙달하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아마 홍패가 회수 된 것 때문에 출신이 정확하지 않다는 듯하다.
중종 11년에 사유에 천거되었지만 대간에서 반대하여 임용되지 않았고, 중종 14년에 대사간에 임명되자 사헌부에서 체직을 청하여 지방으로 밀려났다. 중종 16년 신사무옥 때 체직되었다가, 중종 32년 김안로가 제거되자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이 모두 풀려나면서 직첩을 돌려받았다. 공조참판·한성부윤·형조판서·호조판서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지만 인종 때 대윤에 밀려 의정부우참찬에서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대윤을 제거하는 데 중심인물이 된다.
대윤을 숙청한 공으로 유관의 가족들을 노비로 하사받았다가 복수를 받아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아들 정렴은 정순붕이 거사를 시작할 때 간곡히 만류하였다. 거기다 아우 정현이 이간질하여 정렴은 부친의 미움을 받았다. 정렴은 벼슬을 내려놓고 외곽으로 나가 은거하였다.
아들 정현은 을사사화 때 15세의 나이로 상인으로 변장하여 종들 사이에 섞여 대간들을 염탐하여 정순붕에게 전하고, 정순붕의 상소문을 대신 써 주어 공신 3등을 받았다.
정현은 정순붕에게 조정에 있는 인사들을 지목하여 죽일 것을 권유하였는데, 정원과 안명세가 첫째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상소문을 들고 궐에 들어가면 또 누가 다치게 될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정현은 종종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광화문으로 들어가서 고변하면 너희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현은 승승장구 하다가 사후 선조 때 직위가 추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