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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Sep 06. 2021

신시(神市)의 역모사건(1)

목동 테울과 선녀 영선

     

운해주(雲海州)에서 피어난 구름은 하늘을 덮고 천신들이 사는 신시를 감싸주었다. 꽃봉오리처럼 겹겹이 싸인 신시의 깊고 깊은 구름 속에는 대목장 성주가 삼 년에 걸쳐 지은 옥황궁이 자리하고 있다. 옥황궁에는 천제가 좌우로 해신과 달신과 별신을 거느리고 있고, 지상과 지하와 수국의 273 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신시에는 신시를 관리하고 신들을 보좌하는 선인(仙人)들이 있었다. 선인들은 출생 과정부터가 재미있다. 신시 뽕밭의 뽕나무에 새순이 나면 황금나방이 알을 슬어놓는다. 알에서 나온 애기벌레 중에 황금누에가 있으면 선녀들이 데려가 따로 돌본다. 뽕잎을 갉아먹고 네 번의 허물을 벗으면 비단실을 뽑아내 고치를 짓고 잠이 든다. 고치를 찢고 나오는 황금나방들이 빛을 향해 비행을 하는데, 밤에 깨어나 달빛을 받으면 선녀가 되고 낮에 깨어나 햇빛을 받으면 선남이 된다.

선녀는 천신들의 옷을 짓거나 물을 긷거나 하며 천신들의 생활을 보조하고, 선남들은 천궁을 관리하거나 밭일을 하게 된다.

신시 서쪽에는 복숭아밭이 있었다. 복숭아밭은 천제와 천계의 신들만이 먹을 수 있는 신들의 불사약 ‘천도(天桃)’나무를 키우는 밭이었다. 복숭아나무를 관리하는 도감관(桃監官)은 매일 아침마다 복숭아의 개수를 세어 장부에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황금천도’는 천제에게만 진상되는 것으로 낙과 하나까지 기록하고 폐기할 정도로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삼천 년 전에 황금천도 밭에 도둑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시에도 봄이 왔다. 복숭아 밭 주변의 풀밭에는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고두기 아저씨! 안녕하세요?”

소 목동(牧童) 테울이 도감관에게 인사했다.

“그래, 테울이 왔구나. 송아지가 복숭아 꽃잎 따 먹지 않게 조심하는 거 알지?”

도감관 고둑은 복숭아 철이 되면 테울에게 낙과 한두 개씩 찔러주곤 했다.

소 목동 테울은 소 잔등에 기대어 복사꽃이 한창인 복숭아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껍질 거친 복숭아나무들은 어디에서 저리 고운 꽃잎을 뽑아 올리는지, 붉게 꽃물이 든 봄햇살이 테울의 눈꺼풀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하얀 비단날개 하늘하늘 저으며 헤엄치는 나비들인가, 꽃나들이 나온 선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복숭아밭을 거닐었다.

“어린 목동이 여기서 잠들었네.”

선녀 하나가 장난으로 꽃가지 하나를 꺾어 테울의 가슴에 놓아두었다. 테울은 비몽 간에 멀어져 가는 선녀를 보고 말았다.

“영선아, 얼른 가자.”

저쪽에서 부르자 선녀가 팔랑팔랑 달려갔다.

영선(英仙)이라고? 우지끈 소리를 내며 굵은 꽃가지가 부러진 듯 테울의 가슴속으로 눈발 같은 꽃잎이 들이쳤다. 눈인지 꽃잎인지 그치지 않고 내리더니 온 세상이 꽃잎에 덮이었다. 테울은 발이 푹푹 빠지는 꽃포단에 덮이고 말았다.

소꼬리가 테울의 이마를 쳤다. 정신이 번쩍 들어 둘러보니 선녀들은 모두 떠나고 복숭아나무들만 남았다. 선녀들이 떠나니 복사꽃도 빛깔을 잃은 듯했다.

다음날 소들복숭아밭 옆에다 몰아 놓고 종일 복숭아밭을 기웃거렸지만 선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테울은 선녀들이 일하고 있는 뽕밭으로 가 보았다. 아직 비단 짜는 일이 서툰 선녀들은 누에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 영선은 없었다. 테울은 선녀들이 딴 뽕잎 바구니를 소등에 실어다 주며 영선의 소임지를 알아냈다.

“약재헌에 있다고? 묵은 약초밭을 갈바래 질 해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테울은 아침 일찍 소를 몰고 약초밭으로 갔다.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은 밭에 들어 가 쟁기질을 시작했다. 안 하던 일이라 소도 테울도 서툴고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테울이 달래다가 떠밀다가 엉덩이를 걷어차씨름을 하는데, 어느새 영선이 밭둑에 나와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이랴! 이랴! 하고 외쳤더니 소가 꿈쩍거리기 시작했다.

“물이라도 좀 마시고 하렴.”

밭을 반쯤 갈고 나니 영선이 테울을 불렀다.

“어쩜 그리 소를 잘 모니?”

물을 받아 마시는 테울에게 영선이 칭찬을 했다. 테울은 어깨가 으슥해지며 잘난 체를 좀 하고 싶어졌나 보다.

“아주 옛날에 우리 천제께서 소에게 해수레를 끌게 하셨을 때, 해수레가 워낙 무겁고 뜨거우니까 소가 꿈쩍도 안 하더래요. 해의 운행을 지체할 수 없는 천제께서 소를 번쩍 들어 머리에 이고 걸으셨대요. 배가 눌린 소가 아프다고 소리소리 질렀죠. 천제께서 소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소를 머리에 이려고 하니 소가 뚜벅뚜벅 걸어 나가더래요. 그래서 소에게 ‘또 머리에 이랴?’ 하고 묻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렇구나. 저 소는 너도 자기를 머리에 일 수 있다고 믿나 보네.”

영선의 말을 들은 소가 콧김을 푸푸 내뿜으며 저 혼자 달아나기 시작했다. 테울이 달려가 고삐를 붙잡았지만 고삐가 손바닥을 훑으며 빠져나갔다. 손바닥이 까져 불이 날 지경이었다.

“어머나! 이를 어째?”

영선이 테울의 손바닥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약재고에 약이 있단다.”

영선이 테울의 손목을 잡고 약재고로 데갔다. 테울은 그 상태로 열 마장은 걷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약재고는 그리 멀지 않았다. 영선은 약통을 열어 갈매빛 고약을 손바닥에 고루 발라주고 명주 천으로 감아주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말짱해질 거란다. 약초밭을 반이나 갈아줘서 고마워.”

“아 뭐, 소를 길들이는 중이라 겸사겸사........”

영선이 향기로운 차를 내어왔다.

“둥굴레 뿌리 말린 것을 달인 거야. 손바닥의 열을 내려 줄 거야.”

차의 향이 아늑하고 따뜻했다. 테울은 영선이 옆에 있으니 차를 코로 마시는지 눈으로 마시는지 정신이 아득할 뿐이었다.

그날 저녁 테울은 도통 잠이 들지 못했다. 영선이 감아 준 손바닥의 헝겊을 만지작거리며 매듭이 이리 고울 수가 있는가 싶었다.

다음날 아침에 천을 풀어보니 과연 손바닥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 테울은 아문 상처를 보여준다는 핑계로 영선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소쿠리를 이고 복숭아나무 아래에 서서 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받아 모았다. 꽃잎이 담긴 소쿠리를 안고 약재헌 담장에 붙어 서서 영선이 지나는지 지켜보았다. 약재고 뒤쪽에서 영선의 뒷모습이 보일락 말락 했다. 테울은 신이 나서 꽃가루를 한 줌 흩뿌렸다. 마침 바람이 불어주어 꽃잎 몇 개가 영선의 어깨에 떨어졌다. 영선이 주춤거리며 걸어 나오자 테울은 신이 나서 소쿠리 째 꽃잎을 뿌렸다. 그러나 이내 풀이 죽고 말았다.

영선의 옆에는 웬 사내 하나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사라는 신의(神醫)였다. 무슨 일인지 백사가 영선을 달래고 영선이 몹시 난처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홱 돌아서는 백사를 붙잡으려다 허공을 움켜쥐고는 멀어져 가는 백사의 뒷모습을 애처로이 바라보는 영선이었다. 영선의 발아래에서 복숭아 꽃잎이 시들어갔다.


전자책 https://hellena2188.upaper.kr/content/1148904

종이책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186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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