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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Jul 27. 2021

1. 왕위를 빼앗은 탈해, 잇자국의 비밀

역사 단편소설


<<삼국사기>> 사로국 박혁거세 61년에 두 용이 금성 우물에서 나타나더니 뇌우가 성 남문을 쳤다.

<<삼국사기>> 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에 올라갔는데, 이례 뒤에 유해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죽었다. 유해를 모아 장례하니 큰 뱀이 나와 방해를 하였다.

*****


사로국 박혁거세 거슬한 37년 

조업준비가 한창인 아진포구에서 까치들이 요란하게 울었다.

“저기 배가 뒤집히고 있다!”

한 어부가 소리쳤다.

과연 군선 하나가 파도를 못 이겨 기울고 있었다. 어부들이 고깃배를 띄워 구조에 나섰다. 군선에는 예닐곱 살 되는 사내아이와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병사들은 요란하게 군선 주위를 맴도는 까치들을 베어 죽였다. 군선이 조용해지자 사내아이가 내려섰다.

“나는 용성국의 왕자요.” 

“그렇다면 사로국 궁에 사절로 왔소?”

“아니오. 변한으로 가다가 배가 좌초한 것이니 배를 수선하는 대로 떠날 것이오.”

“그렇다면 머물러도 좋소.”

“이름이 무엇이오?”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는 석탈해((昔脫解)라 대답했다.

하지만 이들을 의심하는 이가 있었다. 의선이 물었다.

“적녀국의 공주가 용성국 함달파왕과 혼인하여 열 달을 채우지 않고 아들을 낳아다고 하던데, 공주가 빼돌렸나 보군. 석(昔)자라는 성씨는 까치(鵲)를 반으로 쪼갠 글자가 아닌가? 함달파왕에게서 도망쳤으니 탈해(脫解)라 급하게 이름 지은 것 아닌가?” 

하고 물으니 탈해는 병사들과 함께 냇가를 따라 올라갔다.

탈해는 동악에 올라 작은 샘가에 앉아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이곳에 정착해야 한다. 반달언덕에 있는 저 집이 마음에 드는구나. 뒷담 아래 숯을 묻어두어라.”

변복한 병사들이 밤에 도성으로 내려가 저택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며칠 후, 탈해는 그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이 집터는 내 조상이 살던 곳이오. 그러니 집을 비우시오.”

사로국 대보 호공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아이는 제 집처럼 익숙하게 굴었다. 집터의 구조가 어떠한지, 뒤꼍에는 바위가 묻혀있는지도 알고 옛 아궁이 터라며 숯을 파내기도 했다. 

집사 백의가 호공에게 물었다.

“정신 나간 떠돌이 녀석이니 매질을 해서 쫓아낼깝쇼?”

“그럴 것 없네. 오갈 데 없는 어린 아이 아닌가?”

호공은 집사를 말리고 사내아이를 향해 말을 이었다.

“참으로 맹랑한 아이로구나. 이 집터가 너의 조상 것이라 하더라도 나 또한 이 집에 대한 소유권이 있으니, 이렇게 하자. 너는 아직 어려 가솔을 거느리기 힘드니 내 집에서 문객으로 머물도록 하여라.”


호공은 그날 밤 홀로 깨어 문간방을 건너다보았다. 용성국에서 온 아이가 호공의 기억 속 한 조각을 꺼내 흔들었던 것이다. 

감히 쳐다보지 못할 여인, 적녀국의 공주를 사모한 호공은 공주의 호위무사였다. 공주가 용성국으로 시집을 가던 날 도망치듯 바다를 건너 사로국에 닿았다. 앞만 보고 달려 사로국의 명망 높은 대신이 되었다. 그런데 공주의 아들이 그를 찾아 온 것은 무슨 운명이던가? 호공은 밤하늘의 먹물이 희미해 질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 하였다. 

집사 백의는 탈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호공이 아들처럼 아끼는 터라 어쩌진 못하고 호공이 없는 곳에서는 탈해를 함부로 대했다. 탈해는 앞으로 펼칠 야망을 위해 우선 백의를 길들여야 했다.

“동악 바위 아래에 내가 물을 마시던 샘이 있다네. 이 뿔잔에 샘물을 담아 오게.”

백의는 어린 녀석이 하대하는 말투가 아니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먼 곳까지 가기 귀찮아 마을의 우물물을 담아 왔다.

“동악의 샘물이 아니군. 다시 떠 오게.” 

백의는 너무 빨리 와서 그런가 싶어 나무그늘에서 자다가 해가 진 뒤에 들어갔다.

“다시 떠 오라.”

서탁에 앉아 책을 읽던 탈해는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명령했다. 이쯤 되자 백의도 화를 참을 수 없어 탈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콩알 만 한 녀석이 주인어른의 세를 업고 떠세를 부리는구나.”

바닥에 패대기치려는데 호공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제가 씨름을 가르쳐 달라하였습니다.”

탈해가 무던한 표정으로 대답하니 백의가 무색하여 탈해를 곱게 내려놓았다.

다음날 백의는 여지없이 동악을 오르고 있었다. 골짜기 중턱 바위 아래에 아무도 모르는 샘이 있었다. 그곳에는 탈해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직접 샘물을 떠 주겠다며 뿔잔을 받아갔다.

백의는 뿔잔에 샘물을 담아 오다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까짓 물이 뭐라고 이 더운 날 고생시키나 싶어 뿔잔을 들여다보았다. 뿔잔 안쪽에 손가락 길이 만 한 죽간이 들어있지 않은가? 백의는 수상하여 죽간을 꺼내보려 하였다. 순간 귀를 스친 화살이 소나무에 박혔다. 돌아보니 어느새 따라온 탈해의 병사가 날린 화살이었다. 병사가 다시 화살을 메겨 겨누자 백의는 허둥거리며 돌아가 탈해의 발 앞에 엎드렸다.

“다시는 명을 거스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백의를 수하로 끌어들인 탈해는 호공의 지원을 업고 적극적으로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선에서 일을 처리하는 일에는 백의가 능력을 발휘 하였다. 우선 접근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궁실과는 거리가 먼 세력가들에게 앞날의 액(厄) 한두 개쯤 내비쳐 주고 비방을 알려주었더니 탈해를 은인으로 알고 달라붙었다. 6부의 대신들에게는 병사들을 몰래 보내 재물 손(損)을 조금 내어주면 소문을 듣고 탈해에게 해결책을 물어 왔다. 탈해는 사람을 모으면서도 앞에는 절대 나서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혁거세 60년(기원후 3년), 사로국의 태자는 시위들과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목이 말라 금성의 우물에 갔더니 탈해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탈해의 이야기를 넋을 놓고 들었다. 태자는 그 모습이 아니꼬웠다.

“재미있는 사냥감이 나타났군.”

태자는 탈해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탈해의 상투를 꿰어 나무에 박혔다.

“네가 용성국의 왕자라고? 남의 나라로 쫓겨 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혹세무민이더냐?”

아우 남해가 말렸지만 태자는 탈해를 모욕하였다.

탈해는 태자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아무 일 없는 듯 화살을 뽑아내고 떠나갔다.

며칠 후 새벽에 시위가 급히 태자를 깨웠다.

“남문이 깨어졌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술에서 깨지 못한 태자는 경황이 없었다. 아우 남해가 군사들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막아냈다. 태자는 시신조차 찾을 수 없고 거슬한의 유체는 훼손이 되어있었다. 뒷일을 수습하는 일은 남해의 몫이었다.

거슬한의 유체는 다섯 조각이 나 있었다. 한데 모아 능을 만들려 하니 탈해가 대신들을 통해 전해왔다.

“반란군의 잔당들이 거슬한의 능을 훼손할 수 있으니 속여야 합니다.”

신하들이 의논하여 다섯 개의 궤로 나누어 사방으로 운구하게 했다. 다섯 기의 능을 만들어 장례를 치러야 했다. 

남해왕자는 시조능에 엎드려 오열했다.

“두 분의 성인이 한꺼번에 떠나시니 사로국의 운명은 어찌되는 것이옵니까?” 


거슬한의 가슴에는 붉은 반점이 있었다. 천제(天帝)의 인장이 찍혀있어 천자로 추대 된 것이었다. 그 인장은 대물림 되어 태자의 이마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런 태자가 죽었다.

혁거세도 떠나고 태자도 없는데 누가 왕의 자리를 이어 받을 것인가? 

둘째 왕자 남해의 몸에는 천제의 인장의 없었다. 6부의 회의에서는 누구를 왕으로 추대할 것인가 논의가 한창이었다.

“남해왕자의 몸에는 비록 천제의 인장이 없지만, 이번 외적의 침입에서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소. 당연히 남해왕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진지촌의 촌장이 강력하게 주청하였다. 

6부 대신 중에는 탈해의 측근도 있어 탈해를 추천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탈해를 드러낼 시기가 아니었다.

“남해왕자는 천제의 인장이 찍혀있지 않으므로 거슬한이 아닌 ‘버금’의 지위를 갖는다는 조건으로 보위를 잇도록 하십시다.”

이리하여 남해왕자는 거슬한이 아닌 ‘차차웅’의 칭호를 받고 보위에 올랐다. 

차차웅이 보위에 오른 지 넉 달도 안 되어 (기원후 4년 7월) 낙랑(동예)의 군사가 침입하여 금성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낙랑(동예)국이 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이토록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오?”

남해차차웅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우리 6부의 선조들이 북쪽의 너른 들판에 살 때에 조선이라는 큰 나라를 이루고 있었지요. 큰 땅을 다스리기 위해 조선을 세 개의 관경으로 나누어 동쪽은 진한, 서쪽은 변한, 남쪽은 마한으로 각각 왕을 두어 다스렸습니다. 위만이 변한의 기준왕에게서 왕위를 찬탈할 때 변한의 낙랑현 성주 최숭이 유민들을 이끌고 마한 지역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가 바로 낙랑(동예)입니다.”

“우리 선조들 또한 조선의 진한 땅에서 한나라 도적을 견디다 못해 마한 땅을 거쳐 이곳으로 내려 와 나라를 세웠으니, 낙랑(동예)국과 사로국은 형제가 아닙니까?”

“낙랑의 최숭은 부여국의 천자에게 벼 삼백 석을 조공으로 바치고 북을 하사받았는데, 나라의 변고가 있으면 스스로 소리를 내는 신물이라 합니다.”

“허어~ 그런 낙랑(동예)국이 그것을 믿고 이리 방자하게 구는 것이군요.”

신하들이 여기저기서 울분을 터뜨렸다.

“그런 낙랑의 군사가 무슨 이유로 침입을 하였을까요? 과인이 직접 가서 그 이유를 물어보도록 하지요.”

차차웅의 말에 호공이 만류했다. 

“신 호공, 거슬한의 총애를 받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소신이 그 책임을 지고 낙랑국 장수를 만나러 가야 마땅하지만 이제 소신이 늙어 사로국에 도움이 되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를 대신할 인재를 천거할까 합니다. 지략이 뛰어 난 자입니다. 이번 일을 맡겨 보십시오.”

호공은 탈해를 천거했다.

“공의 충심은 잘 알고 있소. 그 자에게 일을 맡겨 보지요.”

이렇게 탈해가 낙랑의 장수를 만나러 나서게 됨으로써 정식으로 출사하게 된 것이다. 탈해는 호위병을 물리고 홀로 낙랑군 진영에 들어갔다. 

낙랑군 장수가 화난 표정으로 탈해를 맞았다. 그런데 탈해가 낙랑군 장수에게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일을 이리 처리하는 것이오?”

“탈해공이야 말로 약조를 지키지 않는 것이오? 군사를 빌려주었건만 약조한 대금도 치르지 않고 기별 한 자 없지 않소?”

“지난 번 거사는 실패한 것이오. 거슬한과 태자를 제거했지만 남해왕자는 처리하지 못하였잖소.”

“남해가 운제산에 숨어들기에 산을 포위하고 사흘을 뒤졌소. 구름이 산을 뒤덮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남해를 찾을 수가 없었소. 그러는 동안 탈해공은 뒤에 숨어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더이다. 그래서 이리 살아남아 사로국의 사신으로서 왔구려.”

“그거 참!”

탈해는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거사는 실패했소만 끝난 것은 아니오.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나를 믿고 돌아가 기다려 주시오.”

“무얼 믿는단 말이오? 지난 번 운제산의 구름도 남해의 아내 아로부인이 신적(神蹟)을 행하여 만들어 냈다는 소문이 있더이다. 그 틈에 남해가 산을 빠져나와 군사를 정비하여 우리를 쫓아내더이다. 남해의 공만 키워 준 셈이 되었소. 게다가 박혁거세가 천자의 아들이라고도 합디다.”

“들어 보시오. 남해에게는 천자의 인장이 없소. 남해의 아들 유리에게도 천자의 인장이 찍혀있지 않소. 그러니 백성들의 신망도 잃을 것이고 박씨 왕조도 곧 끝나게 될 것이오. 내가 왕위에 오르면 낙랑국을 위해 동옥저 땅을 쳐 드리리다.”

낙랑의 장수는 깊은 숨을 내쉬며 탈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탈해공을 믿겠소.”

탈해와 낙랑 장수는 서로의 팔목을 쥐고 굳세게 흔들었다.


낙랑국의 군사들이 금성의 포위를 풀고 돌아가자 대신들이 탈해의 공을 다투어 칭송하였다. 이에 남해 차차웅은 탈해에게 대보의 벼슬을 내렸다.

남해 차차웅은 첫 고난을 넘어서 안도하였지만 두려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차웅은 천문을 읽을 줄 알았다. 탈해의 별자리가 어두운 기운으로 넘쳤다. 탈해의 재주는 왕자 유리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쳐 낼 수도 없는 존재였다. 우선 딸을 내어주어 눈 가까이에 두기로 했다. 

이렇게 탈해는 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사로국의 두 번째 자리까지 올라갔다. 부마가 되었지만 공주의 처소에는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계획표를 펼쳤다.


재위 20년에 남해차차웅은 결국 아들 유리를 태자로 세우지 못 하고 병석에 눕고 말았다. 왕이 아닌 차차웅의 아들이라 왕위계승권이 압도적이지 못 했고, 무섭게 커가는 탈해의 세력을 감당하지 못 한 때문이었다. 차차웅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면서 수수께끼 같은 고명을 남겼다.

“유리와 탈해 중에 숫자가 많은 이가 왕이 되리라.”

고명대신들은 선왕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탈해의 측근들은 기뻐하였다. 

“나이가 많은 이가 왕이 되라는 뜻입니다.”

대신들의 추대에 탈해는 짐짓 사양의 덕을 표했다.

“선왕께서 단지 나이만을 강조하셨겠습니까? 자고로 덕이 높은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 그 숫자를 봄이 어떠하겠습니까?”

탈해는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쳐야 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현명하신 방법입니다.”

“이토록 고고한 덕이야말로 바로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대신들이 탈해의 사양지덕을 칭송하자 탈해는 자신 있게 떡을 깨물었다.

“서른 두 개입니다.”

떡을 세어 본 신하들이 외쳤다. 

그런 대신들을 노려보며 유리왕자가 떡을 와작 베어 뱉어주었다. 인형극처럼 미리 짜놓은 내용에 따라 연기를 하는 신하들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떡을 살펴보던 신하들의 눈이 커졌다. 

“떡에 .......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탈해와 측근들이 벌떡 일어섰고, 유리태자 측 신하들은 안도했다. 그토록 찾으려 했던 천제의 인장이 유리왕자의 입천장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탈해의 음모에서 유리왕자가 안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과연 선대 차차웅의 혜안이십니다.”

“유리 이사금을 모십니다.”

유리측 신하들이 유리를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왕위를 확신했던 탈해가 야무지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유리이사금은 후사가 없는 것에 조바심을 냈다. 

별궁 깊숙이 은둔하고 있는 운제태후를 찾아갔다. 여든이 넘은 태후는 구겨진 종이처럼 줄어든 몸피로 앉아있었지만, 눈망울만은 익은 머루처럼 까맣게 반짝였다.

“어마마마, 왕위에 오른 지 서른 해가 되어갑니다. 후비에게서조차 왕위를 물려 줄 왕자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를 어찌 해야 합니까?”

잇몸을 오물오물 거리는 노모 앞에서 혼잣말로 넋두리를 해 본들 무슨 별책이 있을까마는, 이사금은 시시각각 죄어오는 탈해의 압박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운제태후의 잇몸이 딱 멈추었다. 까만 눈동자에 늙은 아들의 얼굴을 담았다. 

이튿날 밤에 이사금의 두 후비는 달빛을 받으며 뜰에 서 있었다. 

“달의 정기를 받으며 아기를 점지해 달라고 삼신에게 기도를 하여라.”

하는 운제태후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밤이었다. 별궁에서 스멀스멀 안개가 뿜어져 나오더니 궁궐 담장을 에워쌌다. 달 밝은 밤이건만 금성 어디에서 보아도 궁궐은 안개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달빛을 타고 삼신이 궁궐 마당에 내려섰다. 안개가 둘러쳐진 궁궐담장 안에는 달빛이 가득했다. 삼신은 서천꽃밭에서 따온 꽃을 들고 있었다.

인간들이 아기를 점지해 달라 청을 하면 삼신은 서천꽃밭에 꽃씨를 뿌린다. 동쪽에 파란색 꽃이 피면 용감한 아기를 점지해 주고, 서쪽의 하얀색 꽃이 피면 슬기로운 아기를, 남쪽의 붉은색 꽃이 피면 복 많은 아기를, 북쪽의 검정색 꽃이 피면 수명이 긴 아기를, 가운데 노란색 꽃이 피면 예쁜 아기를 점지 해 준다.

삼신이 들고 있는 꽃은 푸른색 꽃과 검정색 꽃이었다. 삼신이 후~ 입바람을 부니 꽃잎이 흩날렸다. 달빛에 반짝이는 꽃잎은 바람을 타고 후비들의 침전으로 날아갔다. 


사로국 3대 유리 이사금은 두 명의 후비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다. 늦게 얻은 어린 왕자들을 데리고 오릉에 참배하러 가는 행차가 길게 늘어섰다. 이사금이 첫째아들을 안고 탄 수레가 앞장서고 대보 탈해가 둘째왕자를 안고 탄 수레가 뒤를 따랐다. 

그런데 대보가 탄 수레의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날뛰어 바큇살이 부러졌다. 중심을 잃은 수레는 비탈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비탈 아래 수풀 속에서 호랑이 소리와 낯선 여인네의 비명이 마구 엉켜 들려왔다. 시위대가 뒤쫓아 비탈을 내려가니 탈해가 어린 왕자를 안고 올라오고 있었다.

“고맙소, 대보. 목숨을 걸고 왕자를 구하여 주었소. 내 그동안 그대를 오해 했구려.”

유리 이사금은 탈해의 두 손을 붙잡고 고마움을 표했다.

늙은 이사금의 몸에서 어렵게 얻어 죽을 뻔하였던 왕자는 동궁 깊은 곳에서 금이야 옥이야 자라고 있었다. 어느 날, 동궁에 흰쥐 한 마리가 들어 와 잠자는 둘째왕자의 머리맡에 흰 깃발을 꽂는 것이었다. 유모가 놀라 얼른 깃발을 뽑아 숨겼다. 다음날 아침에 동궁 마당에 어지러이 찍혀 있는 호랑이 발자국을 보고 궁이 발칵 뒤집혔다. 천관이 불려 왔다.

“창귀 인 듯 합니다. 대개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이의 원혼이 창귀가 되는데 쥐가 깃발을 꽂는 경우는 처음 듣습니다만, 창귀가 흰 깃발을 꽂으면 호랑이의 .........”

천관은 황망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 하였다. 

유리이사금은 지난 번 수레가 굴렀을 때 들렸던 호랑이 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소신의 능력으로는 호환의 액을 막을 수 없습니다. 창귀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피접하여 호랑이를 따돌리어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시간을 번다는 말인가?”

“창귀의 원혼을 달래야 합니다. 그 연유를 찾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후비가 놀라 가로막았다.

“궁을 떠나다니요. 호랑이 밥으로 내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후비는 왕자를 직접 데리고 자고 품에서 놓지 않았다. 궁 밖에 경비를 강화하여 호랑이가 근접도 못 하게 하고 왕비 처소의 틈새는 모두 막았다. 하지만, 어김없이 왕자의 머리맡에 깃발이 놓여 있었고, 궁 마당에는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 일을 사흘을 더 겪자 후비가 울며 왕자를 내어놓았다.

“왕자를 살려주십시오.”

유리이사금은 두 왕자를 궁 밖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옮겨 키우게 하였다. 그 장소는 이사금과 궁인 하나만 알고 있었다. 후비가 장소를 알면 보고픔을 참지 못하고 달려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유리이사금이 위독하였다. 후비가 궁인을 불렀다.

“왕자를 데려오라.”

궁인은 시위대를 이끌고 궁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어도 궁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방으로 시위대를 풀어 수색하니 서북쪽 십리쯤에서 궁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궁인과 시위대 모두 등에 화살을 맞고 죽어 있었습니다.”

후비는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서북쪽이면 음즙벌국의 짓인가?”

“도적떼나 군사를 만났다면 화살이 가슴에 박혔을 것입니다.”

시위대 좌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였다. 등에 화살을 맞는다는 것은 아군의 공격이라는 뜻이었고, 이는 전투가 아닌 암살이라는 뜻이었다. 이사금이 위독하고 왕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입조심을 해야 했기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왕자의 거처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왕자가 없는 채로 유리 이사금은 임종하고 말았다. 

왕위계승 순위가 가장 높은 탈해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드디어 이사금의 자리에 오른 탈해, 노구에도 기운이 넘쳤다.


마한은 온조왕 때에 백제에 무너졌다. 마한의 부흥군 장수 맹소는 복암성에 진을 치고 백제에 저항하였다. 맹소는 사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탈해왕이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금성에 심상치 않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자네 들었는가? 혁거세 거슬한의 죽음에 탈해가 관련되어 있다는구먼.”

 “나도 그 소문 들었네만, 우리 조부께서도 수상한 일이 있었다고 하신 걸 들었거든.” 

탈해 이사금은 당혹스러웠다. 왕의 성씨를 바꾼 것에 대한 박씨들의 불만이던가? 탈해 이사금은 호공을 시켜 소문의 진상을 알아오게 하였다. 

호공이 소문의 근원지를 추적하여 금성 서쪽 숲으로 가니 한 무리가 움막들을 지어 머무르고 있었다.

“그대들이 소문을 퍼뜨렸나?”

“나는 마한의 왕손 김알지라 하오. 우리는 마한의 부흥군을 이끌고 있소. 탈해왕의 지원을 얻고자 무리한 수를 썼소. 이리 하지 않으면 이사금을 만나지 못 하여 이리 무례를 범하였소.”

알지의 말을 전해들은 탈해는 화를 냈다. 마한의 왕손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속이 타들었다.

“증거도 없이 일국의 왕을 무고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놈들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려라.”

하니 호공이 만류하였다.

“그들의 뒤엔 복암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원을 거절당한 맹소가 왕손마저 잃으면 죽기살기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저들을 달래어 끌어들여야 합니다. 김알지 그자가 얼마나 더 알고 있는지 만나서 알아보심이 좋겠습니다.”

하여 탈해는 은밀히 알지를 만났다. 스무 살 정도의 준수한 사내가 탈해 앞에 나섰다. 탈해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일침을 날렸다. 

“나라도 없이 떠도는 주제에 남의 나라에 들어 온 것도 죽을 일인데, 함부로 입을 놀려대는가?”

알지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대답하였다.

“남해왕이 즉위하던 해(서기 4년) 7월에 낙랑(동예)의 군대가 금성을 포위한 일이 있었지요? 그때 호공의 추천을 받은 탈해공이 낙랑장수와 담판을 지어 포위를 풀고 돌아가게 했다지요? 낙랑의 장수가 왜 그런 싱거운 짓을 했을까요?”

탈해왕은 헛기침을 하며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려 애를 썼다. 알지가 말을 이었다.

“분명 낙랑의 장수는 받을 것이 있어 금성을 포위하였던 것입니다. 거슬한 61년 9월에 금성 우물에 구렁이가 나타났다고 기록했다지요. 이는 반란사건을 뭉뚱그려 놓은 기사가 아니겠습니까? 그 반란사건에 동원된 무리가 낙랑의 군사들이라면 말이지요. 낙랑군이 그 값을 치르라고 금성을 포위하고 시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낙랑군을 끌어들여 반란을 사주했다 이 말인가? 낙랑군이 나를 뭘 믿고 군사를 내었겠나? 그때 나는 출사를 한 상황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또 기록을 뭉뚱그려 놓았더군요. 이사금께서 사로국에 도착할 때 붉은 용이 배를 밀고 왔다고 말이지요. 붉은 용이란 군선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군선의 군사들이 토함산에 근거지를 틀고 탈해공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겠지요. 심부름하던 백의라는 자가 뿔잔에 숨겨진 서찰을 몰래 꺼내 읽다가 죽을 뻔 하였다지요.”

탈해왕은 칼을 뽑아들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어찌 그 일들을 다 안단 말이냐?”

“우리 마한 왕실은 백제 온조왕에게 도성을 빼앗기고 고구려로 망명하였지요. 그곳에서도 마한부흥을 지속하였습니다. 말갈군과 협력하여 마한의 도성이었던 마수성을 되찾은 적도 있었지요. 그때 말갈군 지휘부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꽤나 쏠쏠 하더이다.”

알지는 칼날 앞에서도 할 말을 다 하였다.

탈해왕은 칼을 거두었다. 알지의 기백과 기지가 쓸 만 하였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군사를 내어 백제를 치는데 협력해 주시오.”

“우리 사로국은 금관가야와 왜의 세력을 견제해야 하므로 함부로 백제를 자극할 수 없다. 대신 마한의 잔존 세력들을 보호해 줄 수는 있다.”

탈해는 알지에게 대보 벼슬을 주어 곁에 두었다. 

하여 알지는 복암성의 장수 맹소와 함께 사로국에 의탁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탈해이사금 5년 8월에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며 항복하였다’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에서 알지를 마한 출신으로 추정)


개정판 책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1033006


전자책 

https://hellena2188.upaper.kr/content/1149114



목차


1. 왕위를 빼앗은 탈해 

 2. 새잡이 총각, 왕위를 되찾은 파사왕 

 3.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아달라왕 

 4. 구렁덩덩 신선비, 왕위를 되찾은 유례왕 

 5. 흥보놀보전, 차대왕과 신대왕 

 6. 눌지왕과 세 개의 신물 

 7. 거문고갑을 쏴라, 소지왕 암살사건의 재구성 

 8. 멧돼지를 구해 준 머슴 설화, 도림과 개로왕 

 9. 남편의 첩을 죽이라 부탁한 용, 우산국의 멸망 

10. 복을 구하러 떠난 총각, 가야 월광태자 

11. 사비천도, 곰여인을 버린 성왕 

12. 운명의 신 감은장 아기, 선화공주와 무왕 

13. 두꺼비 사위 온달 

14. 두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 진 흠돌의 난 

15. 만파식적을 되찾은 효소왕과 부례랑 

16. 구렁이와 까치 설화, 성덕대왕신종 

17. 걸 킹, 표훈대사가 아들로 바꾼 혜공왕 

18. 의자놀이, 최종승자 원성왕 

19. 호랑이처녀와 김현, 소성왕의 회고록 

20. 엄친아 경문왕 

21. 여우누이 진성여왕 

22. 궁예와 발삽사의 노인 

23. 승천하다 추락한 용의 아들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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