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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향나무 May 31. 2023

이런 불편함은 언제나 환영이야.

참 많은 마음을 받았구나.

편지를 자주 꺼내 읽는다. 나에겐 이 시간은 힐링과 같다.

힘든 일이 있든 없든

그냥 읽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는다.

그러다 보니 이젠 편지 봉투만 봐도 누가 쓴 편지인지 단번에 맞출 지경까지 왔다.

편지 봉투만 봐도 그 사람의 취향이 조금 보인다. 

편지봉투에 아무것도 안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꼭 똑같은 말만 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읽을 때마다 매번 마음이 다르다.

똑같은 내용을 다시 읽는 건데.

그때 읽었을 때랑 한 달 뒤에 다시 읽었을 때랑 읽고 난 뒤 생각이 다 다르다. 

전에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생각이 보여서인지, 내 기분이 달라서 다르게 느끼는 건지.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이런 과정이 좋다.

두고두고 다시 꺼내볼 수 있음에 좋다.



편지 봉투를 열기 전에 항상 설레는 마음이 먼저고,

두 번째는 벌써 감동이다. 읽지도 않았는데 감동이다.


이 말을 듣고, 한 번은 친구가 "거기에 아무것도 안 써져 있거나 이상한 말이나 관계를 끝내자는 말이 쓰여 있을 수도 있잖아 근데 열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벌써 감동이야?" 라며 말한 적이 있다.

솔직히 이상한 말이나 아무것도 안 쓴 빈 종이면 좀...... 김 빠질 것 같다.

그럼 기대감을 가지고 편지 봉투를 여는 건가…

근데 반대로 관계를 끝내자 식의 내용이나, 슬픈 내용이 담긴 거라면 오히려 김 빠진다기보단 글을 써서 줬다는 거에 고마울 것이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쌩까거나 연락을 아예 안 받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글을 쓴 만큼 시간을 들였고, 그만큼 이것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진심이라는 뜻이니... 

관계의 끝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았다는 고마움과 동시에 내용을 보고는 슬픈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내용이든 저런 내용이든 내용에 따라 다른 감정이 들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고 답했다.



아직 그런 내용의 편지는 받아보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편지봉투를 보면 설렘과 감동이 먼저이다. 



편지 봉투를 열어 편지의 첫 문장을 읽다 보면 편지를 받은 그날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난 기억력이 굉장히 안 좋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날은 뭘 먹고 뭘 입고 어떤 날이었는지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장 어제 뭐 먹었는지 한참 생각 해야 되는 사람이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그 장소로 돌아간 것 같은 마음으로 편지를 읽게 된다.



편지들을 쭉 읽다 보면 항상 마지막에 드는 생각은 


‘난 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받았구나.


날 아끼는 사람이 있구나.


내 주변엔 참 다정한 사람들이 많구나.’

였다.



또 다른 하나는

편지 속 내용들 하나하나 말할 순 없지만, 어쩜 그렇게 각자 성격이 글에서 잘 드러날 수 있는지

편지 속 구절들을 보다 보면 어느 한 구절에는 그 사람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 사람 그 자체로 보일 때가 있다.

난 이럴 때마다 편지 속 어떤 부분보다 그 한 구절이 너무나 그 사람 같아서 더 좋았다.


편지를 쓰다가 펜을 바꿨는지 갑자기

‘아 이 볼펜이 글씨 쓰기 좀 더 좋네’ 

라는 구절.



편지에 그 사람 목소리가 음성인식이 되면서

‘나중에 늙어서 이웃사촌이나 하자.

 내가 윗집 할게 

좀 시끄러워도 봐줘’

라는 구절.



하늘만큼 우주만큼

이라는 구절.



누구보다 유치하다며 치를 떨었던 사람이었는데 편지에 있으니 그렇게 담백한 단어일 수가 없다.

평소에 친구가 말로 했으면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지고 당장 토 하는 시늉을 하며, 징그러운 물체를 보듯이 봤을 테고, 연인이라면 진짜 뭐야 라며 부끄러워했을 거다.



편지는 이런 불편함도 편함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나 보다. 

어쩌면 내가 그 글을 쓴 사람에게 긍정적인 마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콩깍지가 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헤어진 남자친구가 그렇게 써준 걸 다시 보더라도 핀잔을 주고 싶진 않을 것 같다.



그 마음이 가볍지 않고

쉽지 않음을 알기에 그런 건가.

그래서인지 좀 더 조심스럽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오래 남는 거라 신중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다.

그래도 이런 불편함 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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