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것도 내 마음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한 것.
그 사람에게 어떠한 말의 형태로 다정함을 말하는 마음도
위로를 말하는 마음도
내 마음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한 것.
물론 그 사람에게 따스한 말들과 위로의 말들을 전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닳는 것도, 내 마음을 뺏아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혼자 있어도 힘들지 않을 때
내 마음의 여유가 남아 있을 때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에게 다정함을 말하고 싶었던,
위로를 건네주고 싶었던,
힘을 주고 싶었던
이러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와중에 나도 사람이라고
내 마음이 힘드니 다른 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졌다.
참 아이러니하게 그 사람이 위로가 필요할 땐 내가 여유가 없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서야 깨닫고
나중에서야 그랬었구나 한다.
어느 한쪽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나중에서야 깨닫고 나중에서야 그랬구나 하면 마음이 좋진 않다.
왜 항상 그 순간에는 모르는 걸까.
왜 눈앞에서 없어져야 아는 척이라도 하는 걸까.
나중에서야 아는 게 아니라, 순간에 알았으면 좋겠다.
한편으론 몰랐을 수도 있지 괜찮아라고 생각한다.
그 다정함과
그 위로와
평안을
말하고 바라는 사람도 사람이니깐.
그래도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누군가는
너무 내 마음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한다고
왜 내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더 들여다본다고
내 마음이 먼저가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근데 그럼 좀 어때
이런 거에 욕심부리면 안 되나.
그런다고 진짜 내 마음이 닳는 것도 아닌데
그런다고 진짜 전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안 하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을 텐데
그 눈곱만큼 보겠다고 눈곱만큼 알고 싶다는 게 욕심이라면 너무 작은 욕심 아닌가.
그럼 또 누군가는
가끔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해요 라고 말하겠지.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을 알아야 내 마음도 들여다보고
연습을 해봐야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저 다른 누군가의 평안을 바라고
힘듦을 알고
위로를 말하고
다정함을 말하고
이 모든 것을 '나중에서야'가 아닌 '그 순간'에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이런 욕심을 가지고 있다.
각자 욕심 하나쯤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