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엔 나만 있었다

수민이, 향기, 그리고 내가 마주한 나

by Horang unnii


프롤로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시리즈 안에 모든 글을 같은 결로 묶을 필요가 없다는 것.


사람의 하루가 일정한 톤으로만 흘러가는 것도 아니니까.

때로는 웃음, 때로는 고요ㅡ

그리고 아주 가끔은 꿈으로 찾아오는 내면의 이야기들.


그날 새벽에 꾼 꿈은 유난히 선명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고,

마치 나 자신을 카메라 뒤에서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루가 너무 복잡할 땐,

잠이 내 마음을 정리해 주는 시간인 것 같다.

그날도 그랬다.

현실에선 말하지 못했던 마음이

꿈속에서 나를 대신해 말했다.





꿈의 기록



나는 오래된 친구 수민이와 함께 있었다.

그 친구는 지금 호주에 살고 있는데,

꿈속의 그녀는 늘 그랬듯 밝고 자유로웠다.


우리는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를 찾았다.

축제를 준비 중이라며 교장 선생님이 웃었다.

한 여자 선생님이 다가와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 제 기숙사에서 쉬어요."


그 방엔 네 명이 묵게 되었다.

나, 수민이, 나를 뒤따라 여기까지 온 연하 남자,

이름 모를 여자 동생


그 남자의 사연이다.


"누나를 좋아해요. 사랑하고 싶어요. 애인으로 사귀고 싶어요."


나는 거절했고,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아이 엄마야. 딸이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말이 어쩐지 내가 뱉어두고도 씁쓸하고 외롭고 아팠다.

그 남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내가 두드렸다.


그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래 묻어둔 감정의 파동이었다.


이름 모를 여자 동생은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나와 이 방의 모든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본다.

왜 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밤이 깊어졌다.

각자 하얀 홑이불 하나씩 덮고 누웠다.

가까운 듯 멀리, 일정의 거리를 두고

같은 일행인 듯 또 남인 듯.


우리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새벽 동이 트이고,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들어왔다.

뻗으면 닫을 거리에 문을 닫았다.

아직 깨고 싶지 않았다.

잠시라도 더 머물고 싶은,

그 애매한 평온함이 좋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 방,

침대도 없이

바닥에 이불을 깔고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그 텁텁한 고요함이 좋았다.


그때 여자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그녀의 발소리가 알람이 되어 조용히 울렸다.


"일어나요. 시간이 됐어요."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뒤로 내 시선이 멈췄다.

공기가 달라졌다. 무겁고 뜨거웠다.

수민이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늘 과감했다.

그녀의 웃음엔 자유와 장난이 섞여 있었다.


그 둘 사이의 온기가 번져가며

방 안은 조금 더 숨 막히게 달아올랐다.

누군가는 충동에, 누군가는 호기심에,

누군가는 외로움에 이끌려 있었다.


언제 감았나 모르지만 눈을 떴을 때,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또, 나는 화장대 앞 거울에 비친 내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적당히들 해."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밖으로도 내 속에서도 크게 울렸다.

그 말은 사실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더는 미련에도, 충동에도

끌려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고백.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들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내 안의 억눌린 본능과 마주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난 거였다.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그저 거울을 응시했다.

그 거울 속엔, 오래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겹쳐 있었다.



아침이 왔고, 우리는 각자 짐을 쌌다.

수민이는 자신의 캐리어에서 향수를 꺼내 들었다.

호주에서 사 온 예쁜 향수병 하나를 내게 건넸다.

하나는 청포도 향,

또 하나는 보랏빛 향기.


"이거 좋은 거야. 뿌려 볼래?"


받아서 뿌려 볼 법도 한데,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 내 거 있어."


'이제 나는 내 향기로 살겠다'는

엄포의 선언 같았다.



짐을 마저 싸는데

그 뒤로 들려오는 하나의 목소리

선생님이 내게 물건 하나를 건넸다.


"이거 빠졌어요."


내가 아끼던 파란색 목베개였다.

어딜 가든 들고 다니던 작지만 안락한 베개.

그건 내 평안의 상징이었다.

마치 내게


"이건 잊지 말아라" 하시는 듯 느껴졌다.


복도로 나서려는데

여 선생님이 우리에게 물었다.


"동훈 씨 알아요?"


그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수민이의 과거, 그리고 내 기억 어딘가에도 남아 있는 이름.

우리는 서로를 한번 바라보고 조용히 웃었다.


운동장에선 축제가 한창이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내 캐리어를 끌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진짜 나가야 할 때야."






깨어나서


한참 동안 그 꿈을 곱씹었다.

이건 단순한 에로틱 환상이 아니라,

내 안의 여러 인격이 마주 앉은 대화처럼 느껴졌다.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랑했고, 아이를 낳았다.

사랑이 끝나고 남은 건 아이였고,

그 아이를 품은 채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와야 했다.


한동안은 세상을 원망했고,

남자를 믿지 않았고,

결혼이라는 두 글자를 내 인생에서 지워버렸다.

"이젠 그냥 아이만 키우며 살자."

그게 내 생존의 언어였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서는

"그래 어차피 혼자라면 사랑이라도 자유롭게 하자."

이런 양가적인 마음으로 살았다.

상처와 방황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하나님은 내 그 마음까지 아셨다.

버텨낸 여자의 강단과,

다친 여자의 고집을 동시에 다루시며

조금씩 나를 새롭게 빚어가셨다.


나는 꿈속 수민이 처럼 살았던 때가 있었고,

그 남자처럼 불타올랐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그 모든 기억 위에

기도와 절제가 덮여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말씀하시지만,

때로는 꿈을 통해 내 마음의 깊이를 비춰주신다.

이건 예언이 아니라 점검이다.


나는 내 안의 방을 정리하는 중이다.

욕망과 신앙, 자유와 책임의 경계선에서

조용히 한 방향으로 서는 중이다.


라오스에 지내는 8개월 동안 여러 남자들이 다가왔다.

대부분 거절했지만,

잠시나마 상상 속에서 여러 그림을 그려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배웠다.

지금의 나는 새롭게 태어난 나이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다듬어 가시는 과정안에 있다는 것을.


결혼, 가정, 배우자

그 모든 것을 소원하게 되면서

작은 생각하나까지도 점검하게 하신다.


때로는 '테스트받는 중인가?'싶을 때가 있었고,

그 시기를 지나며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내게 좋은 것만 주시려 한다."


불필요한 것에 낭비할 시간을 비켜가게 하시고,

감정이나 충동에 끌려가지 않도록

조용히 분별하게 하셨다.


정말 재밌는 건, 내 손으로 '배우자의 기도'를 써내려 갔다는 것이다.

아주 세심하게, 아주 자세하게.

혼자 웃으며, 하나님께 말했다.


"이런 신랑감 주세요."


그러다 문득 알았다.

그런 신랑을 주실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룰루랄라 웃고 있던 나 자신을.


언젠가 나의 '배우자의 기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나로 살면서,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결혼'이라는 두 글자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내가,

이제는 그 단어를 깊고 자세히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런 내가 이렇게 바뀌었다.

이젠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함부로도 대하지 않는다.

바른, 옳은, 반듯한,

그런 나로 살고 싶어졌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사람이 내게 온다'는 말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겠지.


하나님은 그렇게

내 상처와 오해까지 다루시며

나를 새롭게 빚어가고 계신다.









<파란빛 향기로 남다>




밤새 내 안의 방이 흔들렸다

억눌린 나와 자유로운 내가

한 이불속에서 숨을 나눴다


사랑받고 싶은 나

믿음을 지키려는 나

모두 주님의 품 안에서 울었다


나는 향수를 고르지 않았다

세상이 만든 향 대신

주께서 내게 입혀주신 파란빛 향기


이제 내 방은 비어 있지만

빈자리마다 은혜가 머문다


눈물은 향이 되고

고백은 빛이 되어

내 안의 어둠을 덮는다


주님, 내 방을 정리하소서

내 안의 모든 그림자를 안으소서

그리고 내가 떠날 때

그 향기로, 주님께로 가게 하소서






에필로그



두 번째 기록은,

내 꿈을 통해 내 마음의 구조를 들여다본 이야기다.


그 방은 내 내면이었고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나였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멈추라면 멈추고, 가라면 가라.

그리고 네 향기로 살아라."


나는 안다.

나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하나씩 나를 다루어 가신다.


아주 작고 세밀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시고.

그래서 또 오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묻고 얻으며 나아간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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