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쾨르는 92세를 살았다. 그의 삶은 인간 삶의 표본이 될만하다. 신은 왜 나를 태어나고 살게 했을까?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삶은 태어남의 이유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쫓아가다 보면 먼저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 한다. 리쾨르는 나름대로 탄탄한 체계를 가진 세상에 대한 해설서를 가지고 죽어서 신과 마주 했을 것이다. 과연 그는 죽기 전에 행복했을까? 비록 인간계에서 긴 하지만, 나름 전 세계가 인정할 만한 해답서를 가지고 하늘로 갔으니 죽기 전, 그는 행복했을 것 같다. 24페이지의 그의 사진도 행복해 보인다.
리쾨르의 여정은 정통 사유의 길이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것도 에드문드 후설의 ‘현상’과의 혼동으로 ‘해석’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리쾨르는 후설의 사유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후설의 결과물과 사유 방법들을 공유하고 있다. 또, 리쾨르는 다른 많은 서양 철학자들처럼 언어에서 사유 행위의 출발점을 찾고 있다. 상징에서 은유로, 종국엔 이야기로 나아간다. 언어는 서양 사유의 전통에서 현실의 반영, 사유의 집적된 형태로 취급되기에 많은 사유가 언어에서 출발하게 된다.
리쾨르의 문학비평에서의 공헌, 성경해석학에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떠나서 그가 평생을 들고 살았던 것은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궁극적으로 리쾨르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그가 스님이고, 수도사였다면 번뜩이는 삶의 의미를 깨달았겠지만, 그는 학자이므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서양철학의 방대한 도서관을 뒤져가며, 정말 끈질기게 정리하고, 선별하고 해석해내고 있다.(사실 요약서에서 그 작업의 끈질김은 뒤에 붙여진 색인이나 인용을 통해 알 뿐이다.) 하지만 리쾨르에게는 무릎을 치게 하는 탁견은 없다. 결국 그의 사상은 현재 우리가 가는 방향이 맞고, 그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아주 평범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