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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영화

by YT

최근 DC코믹스의 ‘슈퍼맨 VS 배트맨’을 대하며 생각의 무한한 생산성을 긍정하게 되었다. 곧 마블에서도 아이언 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싸운다고 한다. 과거 善의 상징이고, 우리를 지켜주었던 無오류의 그들이 서로 치고 박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과거엔 개별 영웅이었다. 슈퍼맨은 슈퍼맨의 세상에서 살았고, 베트맨은 고담시티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생겨났다. 최근엔 좀 불량스러운 영웅도 나타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들이 뭉쳤다. 한 팀이 된 것이다. 그 전조는 아주 오래전에 만화영화로 나왔던 ‘슈퍼 특공대’가 그 최초의 버전일듯하다. 몇 년 전부터 영화에서 마블의 히어로들이 어벤저스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그들 간 다소의 갈등도 있었지만, 암튼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영웅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운다. 만약 내가 마블의 콘텐츠 기획 담당자라면 절대로 영웅들을 싸우게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간 그들이 쌓아온 이미지 때문이고, 그들의 내공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기획자로서는 싸움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의식도 여기에 있다. 히어로들 간의 싸움이 현실화된 지금, 과연 다음은 어떤 히어로 영화가 가능할까? 나로서는 아이디어가 없다. 어떤 구성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끌어갈 것인가? 영웅의 아들과 딸들이 등장할 수도 있고(퍼시 잭슨), 공통의 적(타노스)을 등장시킬 수도 있을지 모른다.

전자 제품도 이와 비슷하다. TV는 TV였었고, 전화기는 주방을 넘보지 않았다. TV는 거실에만 있었지, 내 손에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전자 제품 간의 영역은 무너지고 있다. 전자 제품들이 그들끼리 치고 박는 것이다. 광고 대행사도 마찬가지다. 크리에이티브는 매체 대행사와 싸우고, 디지털 광고 대행사는 조사 회사와 싸우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업자 등록증에 쓰여있는 '업태'라는 것이 곧 없어질 거란 상상을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은 무엇인가? 문제는 미래다. 방향을 잃고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미래를 정돈하기 위해 마블의 영화 기획자처럼 현재를 단속하고 질서를 강요하는 것이 맞는가?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할 수나 있을까? 내 생각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우리의 미래를 믿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미래를 믿고 조류를 같이 타고 나가다 보면, 과정이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갈 때까지 간 막다른 길 일 것 같은데, 결국엔 길을 발견할 것이고, 모두는 빛이 들어오는 그 길로 부겐빌레아 마른 꽃잎처럼 몰려갈 것이다. 이게 세상이 나아가는 모습이다. 꽉 막힌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길을 발견하고, 또다시 막혀버리지만 다시 뚫고 앞으로 전진하고…, 어차피 무한의 시간 속에 우리는 잠시 탑승해 있을 뿐이다. 여기도 물론 속도의 문제와 멀미의 문제가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미래라면 받아들여야 할 것을…, 일단은 미래를 긍정하자, 다다처럼 포스트 모던처럼 다 파괴해도, 우리는 폐허 속에서 자라는 새로운 종에 기뻐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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