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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기원에 대하여

by YT

니체 [도덕의 계보학],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마이클 토마셀로 [도덕의 기원]에 대한 읽기를 마치고…,

0.

[윤이형이상학 정초]는 [도덕의 계보학] 및 [도덕의 기원]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후자가 도덕의 기원에 대한 천착이라면,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도덕의 기반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순수한 사고의 영역에서 도덕법칙을 이끌어낸다는 면에서 3개의 저작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도덕의 발생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1.

마이클 토마셀로의 [도덕의 기원]은 인간 진화와 더불어 도덕 역시 진화했다는 의견을 펼친다. 대형 유인원과 유아 및 어린이들에 대한 비교 관찰을 통해 철저한 경험론의 기반에서 도덕 진화에 대한 이론을 펴고 있는데, 도덕의 기원으로 협업의 발생을 이야기한다. 개인 간의 ‘상호의존’을 통한 자타 등가성에 대한 인식이 퍼지고, 공개적인 지향점 공유를 통해 자기 통제와 자기 헌신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된다. 이런 진화의 진행과정은 다소 가설적인(이론적인) 2인칭 관계를 매개로 공동체로 확장하게 되고,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2인칭 관계를 넘어 문화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 문화의 단계에서 지향점 공유는 인지 혁명을 만들고, 사회의 관습이 생겨나게 되고, 오늘날 우리가 도덕의 제도적인 장치라 할 수 있는 법률과 제도가 정제되는 것이다.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원래 [순수이성 비판] 이후, 순수이성의 의지 버전인 [실천이성 비판]으로 넘어가기 전, 윤리에 대한 본질을 확정할 필요로 쓰인 것으로, 칸트 윤리학의 정수를 온전히 담고 있다. 서양 관념론의 거두답게, 인간의 자유의지가 칸트 윤리학의 저변을 흐른다. 칸트는 순수 이성의 힘으로 절대적인 도덕 법칙을 세우고자 했는데, 어떤 경우에도 선한 ‘선의지’로 논의를 시작하며, 선의지가 보편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당위의 정언 명령이 되어야 하고, ‘개별적인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 법칙에 적합하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제시하며, 이 보편 법칙은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할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도덕의 차원에서 목적들로 이루어진 ‘목적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칸트는 서양 역사의 바닥을 면면히 흐르던 자유의 강을 ‘자율’의 강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이성과 도덕을 사바세계의 꼭대기에 놓았다.

니체의 [도덕 계보학]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도덕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약속을 하는 인간에 의해 책임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책임에서 양심이 태어나게 된다. 이 양심은 강한 자와 그들에 의해 지배되는 약한 자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약한 자들에게 파고드는데, 약한 자들의 자유 본능은 강한 자들에게 억압되거나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압력을 받게 되고, 그 압력이 강한 자와는 반대로 내부의 자기 자신에게 향하면서, 즉 자유 본능(힘에의 의지)이 원한 감정으로 내면화되면서 양심의 가책, 병적인 자기 합리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뒤틀리고, 왜곡된 원한 감정과 반동 본능이 도덕의 조상임을 밝히고 있다.

2.

칸트의 접근은 순수의 차원에서 파악한 도덕이다. 이성에 대한 무한 신뢰의 서양 철학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칸트에게서 실천이성, 즉 의지는 이성이다. 그러므로 의지를 탐구하는 윤리론은 이성의 영역이고, 그것의 순수한 형태가 칸트 연구의 대상이 된다. 마치 현실세계의 진흙탕에서 순수한 것을 정제하여, 순수한 형태의 공을 만들고, 그것을 흰 옷 입은 천사들이 그 공 놀이의 규칙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인상이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순수 이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저급한 세상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마치 종교의 신을 대하는 것 같고, 개인 각각에게는 자신의 이타적인 행동이, 윤리적인 판단들이 너무나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의 감정을 느끼게도 한다.

이에 반하여 토마셀로의 접근은 마치 다윈이 당시 유럽 사회에 가했던 충격만큼 칸트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토마셀로의 도덕은 인간의 진화에 따른 부산물이다. 진화를 통해 인간은 도덕 감정을 확대했고, 관습,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칸트의 순수한 도덕과 토마셀로 도덕의 차이점은 칸트의 도덕 법칙이 순수 세계에서 뚝 떨어진, 신과 같은 존재로 느껴지는데 반해, 토마셀로의 도덕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니체의 관점은 진화론의 ‘인간이 만든 도덕’이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니체는 여기에 왜곡과 오염을 더하여 매우 정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도덕은 역사적으로 강한 자에 대한 저항이 내면화하면서 나타나는,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 생기는 자기 합리화 및 자기 정당화에 대한 감정에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덕은 인간 일반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원한 감정과 반동 감정을 지닌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이 만들어 내고 증폭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니체에게서의 도덕은 칸트와는 달리 오염된 made in Human 인 것이다.

3.

도덕 발생의 시작을 토마셀로의 경우엔 인간의 상호의존에서 찾고 있고, 니체의 경우에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마치 우리에게 익숙한 성선설과 성악설을 보는 듯하다. 그래도 이 둘의 공통점은 인간 혼자서는 도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덕은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적어도 2명 이상의 사람이 있어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도덕은 인간 사회화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난 부산물임이 틀림없다. 칸트가 세운 것처럼 도덕은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가치가 아니라, 시끄럽고, 냄새나는, 왁자지껄한 시장에 탄생의 기원이 있는 것이다.

루시가 아닌 이상(아마 루시 조차도 다른 종의 사회에 편입되어야 할지 모른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사회의 타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부모로부터, 타 구성원으로부터 해당 집단의 문화에 대해 배우고, 규범과 적응에 필요한 규칙들을 배워 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을 통해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 관습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집단의 관습 속에 오늘날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는지 모른다. (현재는 ‘있는지 모른다’라고 애매하게 표현하였다. 나는 이 글의 어디에선가 ‘도덕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을 할 필요를 느낀다)

이러한 전승되는 광의의 관습을 체화하는 사회화의 과정은 먹이를 위해 협동하는 2인칭 행위에서, 채권자-채무자의 관계에서, 집단 속에서, 더 후에는 국가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사회의 밑바탕은 항상 일정 정도의 위계가 존재하므로, 개인에게는 스트레스가 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토마셀로는 발생할지도 모르는 스트레스/고통에 주목하지 않고 자기 통제/자기 헌신이라는 매우 건조한 용어로 표현하며, 칸트는 이상적인, 자율(자기 통제의 다른 표현)이라는 표현으로 단순화 하지만 니체는 훨씬 큰 공감을 보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도덕의 적극적인 발생을 본다. 환경변화 및 위계에 의한 억압에 의하여 인간의 자유 본능은 그 불안정성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그 출구를 찾게 되면서 가치중립적인 자유 본능은 반동 본능/원한 감정으로 변이 되면서, 선과 악의 구분을, 도덕을 만드는 토대 감정을 만들어내게 된다.

4.

자유는 서양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현재까지도 모든 가치 판단의 준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칸트도 니체도 이 자유에서 도덕을 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자유와 도덕은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고, 도덕을 이야기할 때,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게 된다. 생각의 영역에서도 자유는 제한되는 것이다.

칸트에게 자유는 타인에 대해서도 공평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 통제가 필요한 것으로 ‘자율’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자율은 당위의 의무감(정언명령)이 결합되면서 도덕의 보편 법칙, 즉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된다. 칸트가 자유를 정신의 차원에서 접근했다면(생각의 자유, 이성의 자유) 니체는 자유를 본능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본능의 차원으로 내렸기 때문에 자유는 꿈틀거리는 것, 적극적인 의지를 지닌 것이 된다. 니체에게서 자유 본능은 ‘힘에의 의지’로 표현되는데, 다소의 정치적인 요소가 포함되게 된다. 이 자유 본능, 힘에의 의지가 고통 속에서 탈출구를 찾으면서, 내면화되는데 강한 자들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논리로 변이 하게 된다.

5.

토마셀로의 논의에서 종교가 도덕에 미치는 영향 관계는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다만 공동체의 문화 체계 중 하나라는 측면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공동체의 문화 체계는 공동체의 지향점 공유가 암묵적이지만 공개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이것은 법과 규범, 제도와 같은 인지 혁명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며, 종교의 발생 역시 인지 혁명의 발명품 중 하나로 단순히 취급된다.

칸트는 직접적으로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칸트는 이성을 종교의 수준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에, 실천이성, 순수 의지에 의해 정제된 보편 법칙과 도덕은 신적인 차원을 가지게 되므로, 그 자체가 신인데 어떻게 종교와 도덕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니체의 역사적인 고찰에서 종교는 도덕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채권자-채무자의 관계는 조상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전이되며, 공동체의 통합, 더 큰 공동체로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조상은 신으로 변모되며, 두려운 존재가 되며, 민족이 더 커지고, 국가 단위로 확장되면서 조상 신은 차츰 보편 신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즉, 니체의 고찰에 의하면 신, 종교 역시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종교가 도덕의 기원은 아니지만, 종교와의 관계에서 도덕은 좀 더 극적으로 변모한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단순한 가치 판단은 종교가 끼어들면서 ‘선과 악’이라는 좀 더 극명한 대비를 가지게 되었고, 약한 자들은 원한 감정의 안식처를 종교에서 찾게 되고, 이것은 탁월한 종교의 사제 집단에 의해 정치적으로 증폭/이용되면서, 양심의 가책, 죄의식, 죄책감과 같은 도덕의 원천을 낳게 되는 것이다. 종교 경전에서 발견되는 갖가지 도덕적인 수사들은 사제들의 탁월한 발명과 노력에 기인한 것이다.

6.

[도덕의 기원]의 출발은 도덕 감정이라 칭할 수 있는 ‘공감 능력’과 ‘공정’의 진화론적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은 유인원, 나아가 어린아이들에게도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가족에서 친구,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진화되어 나간다. 한편, 공정의 감정은 정의(正義)의 문제와 연결된다. [도덕의 기원]에서는 지향점 공유로 인한 인지 혁명으로 공유된 법과 제도의 확립으로 공정성의 진화를 마무리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보편 이성 차원의 도덕법칙 수립을 목적으로 하기에 정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대우고전총서 [윤리형이상학 정초]에 실린 제5논고(한국인의 원고)에서 칸트의 전반적인 사상에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칸트의 의견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제5 논고, ’정의와 그 실현 원리’에서는 정의는 법이고, 복지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애,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이며, 그 내면의 바탕은 인간의 양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무력하기 그지없는 결론이다. 자유, 평등, 사랑인가?

니체에게 있어 정의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주는 은총, 慈愛 같은 것이다. 언뜻 생뚱맞게 보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를 유기체, 대결 및 경쟁구도에서 파악하는 니체다운 정의론이라 하겠다. 공정을 외치는 것은 약한 자들의 행동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 반동 감정, 원한 감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공정의 감정은 약한 자의 내면화와 쉽게 결합하여 선과 악을 탄생시키는 기원이 된다.

내가 생각할 때, 정의는 단독의 절대 개념이 아니다. 왜냐면 정의는 분배의 문제로 제삼자(타인, 공동체, 국가 등)의 끼어듬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인간 진화의 늦은 단계에서 발생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공정을 외치고,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약한 자들의 주장으로, 어쩌면 그들의 이데올로기이다. 정의는 그 실체가 매우 불분명하고, 역사적으로 정치세력들에 이용당하는 불쌍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7.

과연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은 조상 대대로 전승되어온 사회/문화 양식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런 다양한 사회/문화 양식에서 ‘도덕’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규정은 무엇인가? [도덕의 기원]에서는 인간의 공감과 감정을 동반하는 규정을 도덕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이런 결론은 마치 자기 꼬리를 무는 것 같은 순환에 빠진다. 이런 진화론적 논의에서도 최종의 단계에서는 인간 고유의 이성/자유, 더 나아가서는 신에게 의지 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칸트의 윤리론은 인간 도덕의 기원에 대한 궁극의 설명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도덕은 대대로 전승되어 온 다른 사회/문화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래는 어쩌면 최초의 도덕적 규정이라 할 수 있는 모세의 십계명이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1-4번까지는 신과의 계약에 따른 의무 사항이고, 5-10번까지가 오늘날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윤리적인 규정이다. 모세는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1-4번의 규정에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을 5-10번까지의 규정을 추가하면서, 권위와 보편성을 얻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세는 5-10번의 규정을 이용하여 1-4번의 규정을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강화한다는 것이다. ‘도덕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떠나 모든 도덕 규정은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본질인 것처럼, 공통 기반의 보편적인 것처럼, 도덕은 인식되지만, 실제로 그것이 명문화되고, 타인에게 선포될 때, 도덕은 선포자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이용 되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조선의 삼강오륜이 그러하고, 신라의 화랑도의 규정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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