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외견상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나’의 긴 독백의 형태로 오랜 지하 생활에 익숙해진 이후에 형성된 ‘나’의 觀을 주로 담고 있다. 그리고 2부는 ‘나’의 과거로 돌아와 지하 생활을 하게 된 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3.5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0.5개의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것은 아폴론과의 에피소드 때문인데, 구성상 너무 짧고, 단독으로 취급하기에는 세 번째 에피소드(리자와의 에피소드)와 연결된 ‘나’의 심리적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 상 1부는 2부의 뒷부분에 위치하는 것이 맞지만, 소설적인 구성의 관점에서 현재와 같은 구성을 지니게 되었다.
마치 2부의 에피소드는 1부의 실제 예시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 1부는 2부와 분명한 관점상 차이점을 보인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로 시작하는 1부는 병적인 심리의 예를 보여주는 2부와 닮은 듯 보이지만, 사실 1부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의 꿈틀거림’이다. 이것은 니체 식의 용어로 본다면 ‘의지’이다. 도스토옙스키는 1부에서 꿈틀대는 자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회에서 인증받은, 길들여진 인간이 아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의식의 가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과 일치한다. 전반적으로 니체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사회과학과 공리주의를 비판을 통해, 개인의 가치와 욕망의 가치를 세우려 한다.
1부
‘나’는 샘처럼 떠오르는 생각(의식)의 끈을 붙잡고, 모욕을 느끼고, 상대를 비난하고, 자책을 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며, 끝이 없는 생각의 늪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상 야릇한 쾌락’을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힘을, 의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덕의 계보학]에서 말하는 힘과 의지의 생산과정이다. 정확히 니체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어쩌면 원점으로(현실로) 돌아오는 것일 수 있다. 지하 생활자인 ‘나’에게 의지는 의식을 통해 결국 분해되고 없어져 버린다. 논거, 목적이 의식을 통해 사라지기 때문이다. 1부의 마지막 11장 시작 부분 - ‘여러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의식적인 타성이 가장 좋겠다! 그러니까 지하생활 만세랄 수밖에! ~’ - 너무나 깊어진 의식의 깊이와 고통에서 ‘나’가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타성으로 나와야 한다. 결국 의지는 ‘비누 거품’이 되고 ‘타성’만 남게 되는 것이다.
1부의 중반부터 ‘나’는 이익의 관점을 끌어들여 공리주의, 합리주의, 사회과학 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자유로운 의욕(이것을 도스토옙스키는 자의식이라고 하는데, 현대의 자기 존중 개념이 포함된 자의식과는 구별된다. 단지 가치중립적인 떠오르는 생각과 의지와 유사하다)과 자기 자신의 공상의 가치를 내세우고,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배은망덕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2*2=4가 아닌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니체가 기존 철학에 가하는 비판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2부
1부의 의지의 철학과도 같은 분위기라면 2부의 주인공은 ‘조르바’ 같은 유형의 인물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병적인 인간 ‘나’에 대한 사례들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술집에서 본 어느 장교와의 이야기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두 번째, 세 번째에 비해 아주 강도가 낮아서, 과연 이런 것이 ‘나’의 심리적인 파동을 높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사건의 약함) 더욱 ‘나’의 캐릭터를 잘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길을 가기 위하여 양쪽 어깨를 잡혀 옆으로 밀쳐졌다는 경험은 ‘나’에게 모욕을 느끼게 했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다가, 결투를 고민하고, 소설을 쓰며 점점 깊이 내부의 감정 동요로 빠져들지만, 의외로 길 비키기 같은 어이없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이런 복수의 과정 속에서 ‘나’의 의식은 위로 아래로, 안으로 밖으로 꿈틀대며 요동친다.
동창들과 벌이는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에피소드 후, 자신의 의식 속에서 ‘나’가 별안간 겸손한 영웅이 되면서 벌어진다. 학교 다닐 때는 별로 였던 친구, 즈베르코프의 환송식에 ‘나’가 끼어들게 되고, 자신의 우월함을 계속 의식 속에서 되새김하며, 현실의 그렇지 못함에 모욕을 당하고, 결국 멋지게(?) 자존심을 세우는 편지로 마무리되는 에피소드이다. 이것은 내부 속에 매몰되어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관계 속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나’의 갈망과 관계한다. 자신 속에서 영웅이 되고, 우월한 자, 모욕을 주는 자가 되지만, 현실로 나아가는 순간 ‘나’는 패배자, 모욕을 받는 자가 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중심은 ‘정신의 허세’에 있다. 동창들을 저열한 인간으로 속으로 취급하며, 정신의 허세를 부리고 있다. 현실에서의 기움은 분명하므로, ‘나’는 정신 속으로 도피하여 자존심을 세우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정신의 허세 속에서 ‘나’는 애처로울 정도로 의식을 태운다. 마치 어깨에 천사와 악마라도 앉아서 속삭이는 듯, 끝없는 고민과 번뇌의 늪에 빠진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정신적 허세의 팽창이 ‘탄산가스’처럼 의식에 차오를 때, 출구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나온다. 동창들에게 복수하러 간 곳에서 창녀, 리자와 관계를 맺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정신적인 정복과 모욕을 떠올린다. 하인 아폴론과의 티격태격하는 중에 찾아온 리자는 현실에서 다시 한번 지독한 모욕을 당한다. 지하세계에 찾아온 현실에서의 리자의 모욕은 ‘나’의 지독히도 이기적인 의식이 만든 자격지심 같은 것이다. 장소를 달리하여 증폭되는 ‘나’의 의식은 그 이후 지하세계에 오랫동안 쳐 박힐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다. 리자와의 에피소드는 사건 자체도 두 번째와 연결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도 연결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나’는 자신의 모욕을 정신적인 허세로 극복하려 한다. 이 정신적인 허세는 리자와 만났을 때 정복 욕구로 변형된다. 처음에 허세는 친절 및 자애로 포장되지만, 결국 허세는 정신적인 정복으로 노골화되어 현실에서 펼쳐지고, ‘나’의 상황은 파국을 맞는다. 파국의 상황 후에도 ‘나’는 모욕과 증오가 가져오는 정화의 기능을 떠올리며 위안 삼는다. 정말 병적인 인간이다.
2부의 세 가지 에피소드는 모욕과 위안 – 정신적 허세 – 정신 정복으로 점점 증폭된다. 물론 일관적인 과정을 통해 증폭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의식은 마치 메시인 것처럼, 어떤 경우엔 밖으로, 어떤 경우엔 안으로, 어떤 경우엔 더 안으로, 정말 몸을 망가트리는 turn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맞다. 이 턴이 몸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자연과 진리의 사람’처럼 적당히 타협하고, 벽 앞에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고, 달리 다가도 멈출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자유의지의 끝을 보고자 했던 [악령]의 키릴로프와 같은 사람이다. ‘나’에겐 현실이 박살날 지언정 자동 기계 같은 의식의 샘은 절대 마르지 않는다. 끊임없는 생각의 연쇄가 나를 괴롭힌다. 그런 ‘나’가 살아야 한다면 ‘타성’ 뿐이고 아니면 ‘자살’ 뿐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읽는 내내,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한 심리묘사에 좌절해야 만 했다. ‘나’의 심리는 어느 정도, 아니 거의 100% 나의 바닥 심리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 58페이지 아래쪽과 59페이지 위쪽에는 이 수기를 쓰는 목적이 나온다. ‘과연 나 자신에 대해 그야말로 숨김없는 태도를 취하여 모든 진실을 꺼려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 스스로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 모든 쓰기는 의례 자기 한계와 검열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통해 자기의식의 밑바닥을 피가 나올 때까지 긁었다고 확신한다.
공교롭게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천착하던 중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원래는 작은 딸의 요청으로 주문했던 책으로, 사실 난 책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도덕의 계보학]의 프리퀄 느낌이 있다. 마치 한 작가가 두 책을 작업한 것처럼 닮아 있다. 너무나 유사한 논조로 인하여 그 둘의 영향관계를 파악하고자, 두 사람이 스위스나 독일에서 만났다는 것을 강하게 의심하며, 나는 이 23살의 나이 차이를 가진 두 거장의 연보를 하나하나 비교했다. 그러던 중 다음 백과사전의 한 구절이 나의 궁금증을 해결했다. - ‘독일의 철학자·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고’ [도덕의 계보학]은 [지하 생활자의 수기] 1장을 철학적 논리를 가지고 정교하게 엮은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