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읽기가 한달음에 이루어졌다면, 두 번째 읽기는 각 장 별로 내용의 요약과 니체 생각의 의도를 정리할 목적으로 각 장을 생각 단위로 하며 천천히 읽었다. 두 번째 읽기에서 니체의 여성에 대한 관점, 진리와 도덕의 문제라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주제가 떠올랐고, 도스토옙스키 소설, 동양철학(노장 철학) 그리고 특히 불교와 니체 철학의 유사성과 영향관계에 대해 연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다.
아마 세 번째 읽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읽기에서 드러난, 니체의 생각과 나의 이해 간의 불일치하는 부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니체의 생각을 더 깊이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필요한 부분 부분을 집중해서 읽는 독서가 될 것 같다.
[선약의 저편] 요약과 감상
‘진리가 여성이라면 ~’으로 시작하는 서문은 진리가 여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철학의 독단적이고, 투박한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여성(진리)을 유혹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여성에 대한 사랑을 진리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y)의 메타포로 사용하고 있다.
1. 철학자들의 편견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첫 장은 학문하는 자세에 관한 것으로 모든 철학자, 심지어 물리학자, 자연주의자들까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니체는 그 학자들 이론의 배후에 있는 전제(가정)와 연구 방식을 공격하고 있다. 배후의 전제는 진리의 확정성과 같은 독단과 자기 보호 본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영혼(정신)을 다루는 철학자의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는 한 철학자의 사유 속에는 자신의 사유체계를 보존하려는 본능이 개입되는데, 이 때문에 철학자들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와 스피노자는 어떤 지점에서 자신의 논의가 샛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신이 애초 가려했던 곳을 호도하고 있고,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칸트의 선험적 판단 능력은 ‘왜 선험적 판단능력이 필요한가?’에 대한 물음과 해답으로 바뀌어야 하고,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이러한 확정성이 거꾸로 세계를 재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자기 원인성에서 출발하는 자유의지는 꼼짝 못 하는 상황에서, 자기 내부로 향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2. 자유정신
니체 당대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인한 대중성에 대한 비판과 대중성에 야합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한다. 대중성은 ‘자기 검열’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쉽게 양심의 가책, 후회의 감정으로 번지며 안으로 파고들어 현대인들을 파멸한다. 또, 니체는 ‘도덕 이전의 시대 – 도덕의 시대 – 도덕 너머의 시대’로 도덕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고 있으며, 도덕 너머의 세계는 선악의 구분이 없는 이 책의 제목인 선악의 저편이다. 니체에게 있어 자유정신은 자유주의자들의 자유가 아니라, 정신의 가능성(확장성, 무모함, 시도하는 자, 특히 영혼의 자유)이 펼쳐진 자유정신으로 ‘자유로운 의지’를 의미한다.
36장에서 니체는 특정한 가상 상황을 만들어 매우 순수한 상황에서 ‘힘에의 의지’를 추론하고 있다. '동물과 같은 인간'이라는 순수 상황에서 의지의 작용은 그것에 따른 인과성이 유추되는데 인과성에 따라 의지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의지의 근본 형태가 발견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제된 ‘힘에의 의지다’.
3. 종교적인 것
종교 자체의 무 쓸모를 주장한다기보다, 현대 종교, 목적이 되어버린 종교에 대한 비판을 니체는 감행하고 있다. 니체에게 종교의 경건성, 가면과 위장은 인간의 보존 본능이다. 기독교가 이룩한 것은 인식의 혁명으로, 실질적인 삶에서 인류의 하양 평준화를 지향한다. 이런 하향 평준화 속에서 이익을 보는 계급은 성직자 층이다.
55장에서 니체는 종교의 잔인함을 이야기하면서 앞서 말했던 도덕의 시기별 구분에서 각 시기에 희생되는 대상을 구분한다. 도덕 이전의 시대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바쳤고(희생했고), 도덕의 시대에는 자연(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바쳤으며, 선악의 저편에서는 이제 마지막 남은 신을 바치는 것이다.
4. 잠언과 간주곡
잠언은 너무나 밀도가 높아서 빨리 읽어 나갈 수 없다.
5. 도덕의 자연사
이장은 주로 도덕의 발생과 관련한 역사를 다룬다. 니체 말년에 집필되는 [도덕의 계보학]의 맛보기 내용일 수 있다. 도덕은 무리 본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는 도덕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여 ‘정초’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도덕은 공동체의 본능(평준화, 평등)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본능은 타인에게서 받은 공포의 감정에 의하여 생성되는 것이다. 도덕은 자유의 억압이고, 도덕 교육은 공동체를 위한 사회화의 과정이다. 이런 억압과 교육을 통한 평준화(대중성)는 ‘정신과 힘’을 약화시킨다. 이것은 인간 퇴화, 왜소화의 과정이다. 이것을 전복할 수 있는 고귀한 절대적인 명령자(자유로운 정신, 책임의 무게를 견디는)가 필요하다. 니체에게 있어 이상적 인간은 모순과의 싸움이 삶을 북돋고, 강력하고 화해하기 어려운 충동을 보유하고 있고, 자신을 다루는 세련됨(자기기만)이 유전으로 흐르는 사람이다.
6. 우리 학자들
남성성, 비판가(회의의 반대 개념으로써), 창조자, 입법자로서의 현대의 ‘진정한 철학자’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의 예로써 프리드리히 대왕과 괴테를 들고 있다. 첫 부분에 나오는 객관적인 인간은 긍정이 아닌, 과정의 개념이다.
또, 힘에의 의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데, 그리스 시대, 르네상스 시기를 이상적 상황으로 규정하고, 니체 당대의 문제를 비판하고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무리 본능이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서 왜 니체는 역사에서 힘에의 의지를 고찰하는가? 현실에서, 역사에서 현상을 고찰하면 그 불순정함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쉽게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왜 니체는 그의 핵심 개념의 생성과 평가를 역사 속에서 이야기한 것일까? (니체의 논조로 이야기한다면) “자신감 있게 가라, 무엇이 두려워 피한단 말인가? 네가 맞다고 생각하면 맞는 것이다. 비판받을까 걱정하는 것은 어설픈 사람, 약한 자,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다.” 쩝! 할 말이 없다
니체가 살았던 시대 ‘통합으로 가는 유럽성’은 혼란을 가중하고, 상황의 복잡함이 높아지는 상태, 이런 민주주의의 탄생 상황에서 의지는 피로해지고,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회의론자들이 득세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거꾸로 고귀한 영혼이 출현하기 직전의 상황이기도 하다.
니체의 의지 분석이 매우 상대적으로 보인다. 니체 당대의 유럽에 대한 분석과 르네상스 시대의 분석에서 그의 태도는 매우 다르다. 본질적인 의지의 발현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좀 해소될 것 같다. 르네상스와 니체 당대의 엔트로피는 다르지 않다. 모두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바늘로 찔러 ‘펑’하고 터트릴 건지, 입구를 열어 조금씩 바람을 뺄 것인지의 문제일 뿐이다. 르네상스는 펑하고 터진 것이고, 니체의 당대는 바람이 빠지며 모두가 젖어들고, 오염되는 시대인 것이다.
7. 우리의 덕
니체가 이토록 여성에게 비판적인 것은 당시 민주주의의 퇴폐성의 가장 큰 수혜자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덕은 세대를 통해 축적되는 것이고, 덕의 실행에는 성실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본다. 그리고 니체는 갑자기 여성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니체에게는 여성의 순종과 관련한 이미지 전형이 있고, 당대의 유럽성의 상실, 평등, 계몽의 이데올로기는 내면화되어 의지를 타락시킨다. 이런 일련의 현상의 최대 수혜자는 여성이고, 여성과 여성성을 지닌 남성에 의해 고귀한 정신은 타락한다. 니체의 여성에 대한 비판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다른 버전으로 보아야 한다. 권리, 저급화라는 그의 명제가 여성에게 적용된 것뿐이다. 그래서 특별히 여성을 비난했다고 하기 어렵고, 민주화의 비난에 대한 확대로 봐야 한다.
진리를 알아가고 찾아가는 방법은 까다롭다. 자기희생을 하는 사람도 그 이상의 것을 찾는 과정이고, 그것은 계속되는 까다로운 과정이다. 까다롭고, 탈선의 위험이 너무나 민감하고, 폭넓게 존재하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진리는 여성에 비유된다.
니체는 기본적으로 영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그 속에서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고, 권리장전 등으로 가장 먼저 민주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무리 본능을 야만적으로 품고 있는 공리주의를 싫어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뫼르소와 조르바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뫼르소의 자유가 인간 안의 타인의 시선과 도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좁은 자유라면, 조르바의 자유는 훨훨 날아가는 거침없는 자연스러운 자유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8. 민족과 조국
개별 민족성과 독일성보다는 전체 유럽성에 우위를 두는 니체의 태도를 알 수 있다. 니체는 나폴레옹의 탄생으로 다시 통합되는 유럽, 새로운 종합을 본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민족성도(특히 독일성) 유럽성으로의 흡수라는 시각에서 봐야 한다. 여기서 니체의 유럽성에 대한 옹호는 니체를 트로츠키와 체 게바라의 선배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그리고 그는 민족 구분을 통해 씨를 뿌리는 민족이 있고, 그 토양이 되는 민족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민주주의 및 과학의 발생의 원흉으로 영국을 비판하는데, 영국 사상은 기계적인 우매함, 정신성이 하나도 없어서, (또 하나의 장애물인) 기독교적인 것으로라도 좀 고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영국은 정신의 측면에서 매우 PREMITIVE 한 종족이라고 니체는 본다. 니체에 의하여 각각의 민족에 대한 분석이 이 장에서 이루어진다.
격세 유전은 장의 소화 운동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생리적인 과정이다. 오늘날에도 EU의 탄생과 탈퇴 등 격세 유전으로 장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노예근성을 가진 평범한 인간을 대량생산 하지만, 그 속에 강한 인간이 형성될 수 있는 토양도 있다.
9.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고귀한 영혼의 탄생과 모습 그리고 타락을 다루고 있다. 고귀한 영혼은 축적을 통해 세대를 거치며 형성되고, 때를 잘 만나는 우연을 가져야 하는데, 고귀한 영혼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지위의 본능을 향유하고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며, 변장이 필요한 것이다. 고귀한 영혼의 고통은 가끔 그를 타락으로 이끈다. 선한 양심과 도덕, 그리고 평범한 인간들에 의하여 파괴된다. 제9장은 최고의 격정으로 치닫는 장으로 음악의 클라이맥스다.
귀족사회는 현실에서 거리를 귀족 내부로 들여와 DISTANCE에서 느끼는 파토스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자기반성, 극복과 같은 영혼 적인 것이고, 철학적인 것이다. 너무나 현대를 사는 나의 가치와 배치되는 주장으로 니체가 아니었으면 책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현대의 명품 소비의 확장은 과거 귀족들이 새로운 것을 찾도록 추진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움을 찾는 속도가 보통 인간의 명품 소비 확장 스피드를 앞서지 못하고 따라 잡힌다면, 귀족의 타락은 시작된다.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이다.
10. 높은 산에서(후곡)
‘기다림 – 반가움 – 나의 변함 – 다시 기다림 – 차라투스트라가 온다.’의 구성을 가지는 시. 고귀한 영혼을 기다리는 고귀한 영혼의 타락과 타락을 극복하고 다시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리는 고귀한 영혼. 마치 우리나라 유명 사찰의 벽에 그려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묘사한 심우도(십우도)를 연상시키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