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두바이에서 아랍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미국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굉장히 진지하고 생각이 밝은 친구로 이슬람 수피즘(신비주의)을 좋아하는 특이한 미국인이었다. 그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그는 자신의 처남을 소개해 주었다. 내 관념엔 당연히 노란 머리의 미국인을 상상했지만 그의 처남은 아랍인, 요르단 사람이었다. 그제야 그의 와이프가 요르단 사람인 것을 알았고, 그의 아버지 역시, 레바논 출신임을 알았다.
또, 두바이의 아랍어 학원에서 생긴 일화다. 당연하게도 아랍어 학원의 수강생들은 모두 외국인(일본인, 미국인, 영국인, 나이지리아인, 선생님은 레바논)이었다. 아랍어 회화 중에 "마 진씨야 투키(당신의 국적은 무엇입니까?)"라는 표현을 하면, 꼭 "당신 와이프의 국적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나는 당연히 내 와이프 역시 한국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친구들은 다른 것 같다. 대뜸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끼리 결혼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로서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상식의 연못에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기분이었다. 당시 나로서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이들의 관념과는 매우 다름을 알았다.
과거 우리나라는 굉장히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 임을, 순수한 혈통임을 강조해왔다. 하나의 민족임을 강조하는 근저에는 ‘단일 민족은 무엇이든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고, 더 끈끈하게 단합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우리 국가를 더 발전하게 할 수 있다’는 기획이 깔려있다. 보통 ‘혼합’보다는 ‘순수’의 가치가, 특히 혈통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절대적인 가치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단일민족’의 강조는 지독한 이데올로기는 아닐까? 편 가르기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누군가의 추악한 기획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현대사에서 단일 민족에 대한 강조는 개발 독재를 끌고 가는 장치가 되었고, 개인보다는 집단, 집단보다는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는 전체주의 모습을 만들어내게 된다. 단일 민족은 탑다운으로 기획된 이데올로기일 뿐이고, 이런 모습은, 현재 벌어지는 반대적인 현상(귀화선수, 다문화 가정 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곳곳에 아직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제는 조직보다는 개인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조직 속의 개인, 국가 속의 개인이 강조될 때 우리는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물론 단일 민족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일 민족'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중립적인 개념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단일민족'의 강조가 의도하는 정치적이고, 프로파간다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면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극동을 너머 세계로 뻗어가고 있고, 지구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일 민족의 강조가 낳을 수 있는 배타성과 폐쇄성은 극복되어야 한다.
두바이는 이제 국제적인 비즈니스의 허브가 되었다. (지구적이진 않아도 적어도 중동 권역에서는) 두바이에선 다양한 국적의 비즈니스 맨들이 활동하고, 그들 각자는 대부분 서너 개의 나라에서 생활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기는 두바이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까지는 레바논에서 나오고 대학은 영국에서 나오고 사우디에서 개인 사업하다가......., "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국가라는 단위에 얽매이지 않고 국제적인 감각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